Jang Il Soon
나와 너는 천지만물과 더불어 하나입니다
옛 말씀에 天地與我同根이요 萬物與我一體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과 땅은 나와 한 뿌리요, 세상 만물은 나와 한 몸이나 다를 바 없다는 얘기입니다. 일체의 현상을 유기적 관계에서 보면,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은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만민은 다 예수님 말씀대로 한 형제요, 온 우주 자연은 나의 몸과 한 몸이나 다를 바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공동체적 잚은 이 바탕 위에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인간이 사물에 대해서 선악과 애증을 갖게 되면, 취사선택이 있게 마련이고, 좋은 것을 선택하는 선호(選好)의 관념은 이(利)를 찾게 되고, 이것은 자연히 현실에서 이웃과 경쟁을 하게 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많은 이들은 선의의 경쟁을 말하지만, 그것은 상황에 따라서 악의의 경쟁도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인간이 자기 분열을 한없이 전개함으로써 자멸(自滅)을 가져 오는 것입니다. 영성적인 절대적인 만을 진리하고 생각하여 상대적인 현상을 무시하는 삶도 아니고, 상대적인 다양한 현실만을 전부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삶도 아닌 바탕에 공동체적 삶은 있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나누기 위하여 부지런히 일하고 겸손하며 사양하는 검소한 삶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또한 인간과 자연과의 사이에서 기본이 되는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삶에는 꾸밈이 없을 것입니다. (1983년) ---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 8-9쪽.
사심없이 자기 부정을 하고 가면
(...)
그래서 일찍이 노자는 아유삼보(我有三寶), 나에게는 보배가 세가지 있다 했어요. 하나는 자(慈)다, 자비함이다 이 말이야. 선악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하신 대로 저 하늘의 비는 선인이나 악인에게도 고루 뿌려주시고 저 태양과 달은 선인에게 고루 비춰주시고 그러는 사랑 말이야. 왜? 악과 선이 다른 게 아니야. 선이 있으니까 악이 있고 악이 있으니까 선이 있는 거라 이 말이야. 일등이 있자면 이등 이하가 있으니까, 꼴찌가 있으니까 가능한 거라구. 근데 이 세상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일등이면 다고, 이등하는 놈은 무시돼. 그러니까 세상이 뭐냐하면 잘못되어 돌아가지. 어떻게 잘못 돌아가? 너나 없이 일등하자니까 골을 싸매고 미쳐 돌아가는 거지. 아는 놈이 모르는 놈 가르쳐 주면 좀 좋아. 나눠주면 된다 이 말이야. 공생해야 하는 거다 이 말이야.
그 공생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만이 아니라 정신의 양식까지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어떻게 해. 요새 세상의 틀이 그렇지 않으니까. 연세대학교 올려면 얼마나 힘이 들어요.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여러분들은 했어요. 그러나 뒤돌아 보세요. 많은 낙오자들에 대해 여러분들은 가슴 뭉클함이 있어야 될 거예요. 교육제도가, 사회의 근간이 되는 모든 체제가 경쟁체제에서 공생체제로 변하지 않으면 여러분이 이 지역의 환경 얘기라든가 연세대학교 내부에 있는 저 숲을 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렇잖아요? 이치가.
내가 이제 여러분들에게 중언부언,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자꾸 예길 하는데 내가 얘기하는 것은 이제 우리가 당면한 과제가 뭐냐는 거야. 두가지가 있어. 반생명적인 일체의 조건을 갖다가 다시 보고 그것에서부터 우리는 탈출해야 돼. 엑소더스. 그것은 주먹을 쥐고 상대를 때려 눕히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변화시키는 운동으로, 비협으로 탈출해야 돼. 비폭력으로 탈출해야 돼. 이 비폭력과 비협력은 간디 선생도 말씀 했지만 그 이전에 우리의 사상에 수운이나 해월의 동학사상에도 구구절절 그것이 기록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3.1 만세에 민족의 자주를, 민족의 존재를, 거룩한 민족으로서의 입장을 천명하는 속에서도 비협력과 비폭력이라고 하는 정신이 깃들어 있던 거야. 그건 바로 동학의 정신이야. 또 그 동학의 정신은 뭐냐. 아시아에 수천년을 내려오는 유.불.선의 맥에서 온거야. 그런데 이러저러한 것이, 모든 종교가 이제는 자기 스스로가 가지고 있더 아집의 담을 내리고 서로 만나면서 이 지구에 한 삶터, 한 가족, 한 몸, 한 생명 이것을 어떻게 풀어갈 것이냐 하는 것을 서로 얘기해야 돼.
아까 노자의 '아유삼보'라고 얘기했는데 자비에 대한 예기했죠? 두번째는 뭐냐. 검약해야 된다는 얘기, 알뜰해야 된다는 얘기야. 이 옷을 가지고 10년을 입어도 괜찮으면, 깨끗하게 빨고 꿰매고 그렇게 해서 10년 이상 입어라 이 말이야. 나머지 수입이 있으면 딱한 자를 도와라 이 말이야. 이상한 노릇이예요. 예수님께서 늘 말씀하신 얘긴데, 있는 자보고 언제나 나눠주라고 하지 않았어요? 약자에게 주라 이 말이예요. 높은 자는 낮추고 낮은 자는 드높이고 이게 예수님의 독행이에요. 우리의 앞으로의 과제는, 폭력과 경쟁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비협력과 비폭력으로써 스스로 적극적으로 해 나가는 일입니다. 검약해야 돼. 그러면서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줘야 돼.
그런데 오늘으니 세상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전세계가 상혼이 깃들어 있는 이 시대에 어떻게 되어 있느냐. 큰 자가 작은 자를 자꾸 훑어 먹어. 그러니까 세상이 제대로 안 돌아가는 거지. 조화를 상실하는 거지. 그러니까 안 돌아가. 숨통이 안트이는 거야. 그러니까 막히는 거지. 아까도 잠깐 얘기했지만 지구가 열번 망하고도 남는 핵무기를 만들고도 또 만들겠다고 하는 이 문명의 틀 위에서 우리가 더 바랄 게 뭐 있어요? 결정적인 결단이 있어야 되잖아요?
또 하나 셋째는 뭐냐? '불감위천하선(不敢爲天下先)'이라. 세상에서 다른 사람 앞에 서려고 하지 말아라 이 말이야. 오늘도 내가 재수없게 여러분들 앞에 섰지만 앞에 서지 말라 이 말이야. 남을 도와서 남이 앞에 서게 하라 이거야. 남이 꽃 피우게 하라 이 말이야. 이웃이 잘되게 하라 이 말이야. 꽃 하나 벌레 하나 풀 하나를 보더라도 다 하심(下心)으로써 겸손한 마음으로써 섬기라 이 말이야. 이것을 노자가 얘기할 적에, 이것은 나의 보배다 이런 말씀을 했는데, 이거 예수님이 다 말씀하신 얘기에요. 바로 길에서, 예수님이 일상생활에서 '나는 길이요' 한 그 길에서 다 말씀한 얘기에요. 우리나라에 엄청난 크리스챤이 있어요. 나는 예수쟁이에요. 일말의 반성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에 대한 철저한 낮춤이 있어야 돼요.
여러분들은 지금 그 감각이 안 들어올 거에요. 세상의 어려움을 자기 등에 메고 간 그 마음. "세상에서 멍에를 진 자여, 고통을 받는 자여,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여러분에게 위로를 줄 것이다." 그건 뭘로 위로를 주겠다는 예기에요? 생명으로써 위로를 주는 것이요, 진리로써 위로를 주는 것이요, 사는 나눔의 길에서 위로를 준다는 얘기지.
오늘 여러분들을 이런 좋은 자리에서 만나게 됐는데 환경의 문제, 오늘날 산업문명의 문제의 일각을 말씀드렸는데,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 뭐냐 그것을 요득하고 파악하지 않고서는, 오늘 여기서 필리포가 "아버지를 보여주세요" 한 그 답답했던 아버지라는 실체가 뭐냐 이것에 대한 파악이 없이는 언제나 본말이 전도된 작업을 하게 될 겁니다. 아무쪼록 깊이 명심하시어서 여러분들의 앞날에, 당장하는 일에 아버지의 축복이,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계시는 아버지께서 작동하시기를 부탁하면서 얘기를 간단히 끝내겠어요. 고맙습니다.
참생명을 지닌자의 모습은 저래야 하는구나
세상에 태어난다는 사실은 대단한 사건 중에서도 대단한 경사입니다. 태어난 존재들이 살아간다는 것은 거룩하고도 거룩합니다. 이 사실만은 꼭 명심해야 할 우리의 진정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가끔 한밤에 풀섶에서 들려오는 벌레소리에 크게 놀라는 적이 있습니다. 만상이 고요한 밤에 그 작은 미물이 자기의 거짓없는 소리를 들려주는 것을 들을 때 평상시의 생활을 즉각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부끄럽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럴 때면 내 일상의 생활은 생활이 아니고 경쟁과 투쟁을 도구로 하는 사람의 허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삶이 삶이 아니었따는 것을 하나의 작은 벌레가 엄숙하게 가르쳐줄 때에 그 벌레는 나의 거룩한 스승이요, 참생명을 지닌 자의 모습은 저래야 하는구나라는 것을 가슴깊이 새기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