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609-2
신영복 선생님 대학교수를 직업할 때 마지막 강의가 2006년 6월 8일 성공회대학 성당에서 있었다. 가볼까 하다가 이래저래 못갔다. 신문에 마침 요약문이 올라왔다. 내용을 보니 지난 해 말 부산 개성고등학교(예전 부산상고) 개교 100주년 기념 행사로 동문들의 초대를 받아 오실 때 내용과 많이 겹친다. 책에 나와 있는 내용들이지만 말씀을 직접 듣고 그날 말을 못잇고 나는 깊은 상념에 빠졌다. 하나도 적지 않았다. 두 시간여 강연하시는 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래 글을 보니 그날 강연이 새록새록 되새겨진다. 마지막 강연이니만큼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하셨을 것이다. 여기에 놓고 되새기자.
이날 강의는 <주역>의 64괘 가운데 가장 어려운 상황을 나타내는 박괘에 나오는 ‘석과불식(碩果不食)’을 주제로 삼았다. 박괘 효사에 나오는 석과는 앙상한 나뭇가지에 마지막으로 남은 과실을 뜻한다. 즉, 박괘는 세상이 온통 악으로 넘치고 단 한 개의 선만 남아 있어 그 한 개마저 악으로 전락할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을 말한다. 신 교수는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며 ‘절망이 곧 희망의 기회’라고, 현재 한국 사회를 진단했다.
이날 '마지막 수업'의 첫 주제는 '죽순의 시작'이었다. 강의의 화두는 죽순과도 같은 짧은 '마디'를 만들어야 나중에 큰 키를 키우게 된다는 것. 마디는 '뿌리'로부터 오며 그러한 뿌리들이 모여 큰 '숲'을 이루는 것이라 했다. 즉 우리사회의 역량, 잠재적 가능성을 꾸준히 키워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 "죽순의 가장 큰 특징은 마디가 짧다는 것입니다. 30m 큰 키를 지탱하는 힘이 이 짧은 마디에서 나옵니다."
- “대나무의 긴 뿌리는 캄캄한 곳에서 오랜 세월 키워온 것입니다. 역경을 겪지 않은 사람이 큰 키를 이룰 수 있을까요.”
- “우리 사회가 디지털화되면서 뿌리보다는 바로 잎사귀를 바라는 문화가 팽배해 있습니다.”
- "동서고금의 수많은 담론 중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희망의 말이 바로 이 '석과불식'입니다. 이 말은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뜻이고 더욱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해서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 “세계무역기구(WTO)와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상징되는 세계화의 물결로 인해 야기된 지금의 위기상황이 석과를 연상시킵니다. (...) 하지만 마지막 과실의 씨가 이듬해 봄에 새싹이 되어 땅을 밟고 일어서듯 진정한 희망 찾기에 나서야 합니다.”
- "겨울의 입구에서 앙상한 가지로 서 있는 나무는 비극의 표상이며 절망의 상징이지만 그 앙상한 가지 끝에 달려있는 빨간 감 한 개는 글자 그대로 '희망'입니다 (...) 잎사귀를 뜯고 나무의 뼈대인 앙상한 줄기를 분명히 드러내 직시하듯, 거품을 떠내고 우리 사회의 경제적 구조, 정치적 구조, 문화적 작용 등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 "잎이 떨어져 뿌리를 거름하는 이치가 바로 절망의 언어를 희망의 언어로 바꾸어내는 이치입니다."
- “박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겨울을 지나 씨앗을 뿌리고 새로운 싹과 열매를 맺는 나무처럼 사람을 키워내야 합니다. ” “씨 하나가 숲을 만들어내듯 사람들을 아름답게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 "우리 시대에 거의 수단화되어 잇고 물질적 가치의 하위에 배치되어 있기도 하지만 여전히 사람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 삶이란 사람들과의 만남이며 사람의 가치를 가장 온전하게 읽어내고 키워내는 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대학"
- "단순히 사람을 키워내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숲이 되는 방법, 사람이 개인이 아닌 숲의 사람이 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 나무는 큰 나무, 작은 나무, 부러진 나무 등 많이 있으나 이 모든 결함을 모아 숲을 만들면 작은 나무나 큰 나무나 흠이 되지 않습니다 (...) 숲이 바로 나무의 완성인 것입니다."
- "한 사회를 이끌어갈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학교의 과제이자 사회의 과제입니다. (...) 어느 한 나무를 똑똑하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결함에도 숲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학교의 과제이자 사회의 과제입니다."
- "우리나라의 인재를 생산하는 시스템이 어떤지 되짚어 봐야 합니다.(...) 각 대학은 물론이고 사회 전체가 훈련된 인재들로 가득차 있을 뿐 진정한 의미의 숲을 가지지 못했다 (...) 각자 나무가 되려 하지 말고 숲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 “나무는 짧고, 숲은 깁니다. 숲은 전체로서의 완성을 뜻하며, 나무(개인)의 결함까지도 품는다는 점에서 나무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숲은 수많은 나무를 길러내는 시스템으로 한 사회의 리더나 구성원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장으로서의 의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 * "중요한 것은 대나무가 그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나무가 반드시 숲을 이루고야 마는 비결이 바로 이 뿌리의 공유에 있는 것이지요. 개인의 마디와 뿌리의 연대가 숲의 역사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엘리트를 재생산하는 구조입니다. 원정출산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구조는 지금 정부기관에까지 꽉 들어차 있습니다. 우리는 죽순을, 감나무를 길러내는 진정한 의미의 숲을 갖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을 아름답게 길러내는 이 숲이야말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내는 장(場)입니다. 우리 사회가 금방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해선 안됩니다. 과정이 아름다워야 하고, 그 안의 사람들이 진실하다면 그것이 바로 희망입니다.”
- “현재 우리 시대의 대학은 취업과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인재 재생산 시스템에 있습니다. (...) 삶은 사람들과의 만남이고 사람의 가치를 온전하게 읽어내고 키워내는 것이 대학입니다. (...) 우리 대학이 우리 사회의 건강한 숲으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대학과 사회의 인식의 개선과 역할 재정립이 필요합니다.”
- “‘차가운 머리(cool head)’에서 나온 이론과 각박한 언어로 비판적인 담론은 진정한 의미의 사상이 될 수 없습니다. ‘따뜻한 가슴(warm heart)’에서 나온 자신의 양심이 인간적으로 융화될 때 진정한 담론이 되고 진정한 의미의 사상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이 '머리에서 가슴까지(from Head to Heart)이고, 인간적인 애정 속에서 진정한 담론과 사상이 나옵니다.
- “현재 우리나라는 과정과 수단보다는 결과를 중시하고 사람을 수단으로 보는 ‘속도 중시’로 가고 있는데, 결과주의는 사회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 사회 발전 과정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 여러분과 함께 노력해 나가겠습니다”
- “삶은 사람들과의 만남인데, 이것을 격하시키는 것은 엄청난 비극입니다. (...) 사람의 가치를 온전하게 읽어내고 키워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대학이자 숲이며, 이런 숲이 곳곳에 자리잡기를 간절하게 기원합니다.”
- "절망의 상황을 희망으로 만들어야 할 과제를 안은 현 시대의 한복판에서 여러 선생들, 학생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 "우리는 사회를 불가역적으로 바꾸어내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 사회변화란 결코 쉽지 않지만 사회를 바꾸려는 노력 그 자체가 삶을 아름답게 하고 보람되게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근본에 있어 사회를 바꾸어내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 "여러분 모두에게, 어디에 있든 사람이라는 씨앗을 묻는 과정을 계속 해가기를 당부합니다. (...) 나도 앞으로 함께 씨앗을 묻어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 "제가 출소하니 서대문 구치소도 없어졌고,그 무시무시하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도 박정희 대통령도 돌아가셨더군요. 내가 처음 취조를 받던 남산 수도경비사령부도 한옥마을로 바뀌고, 남한산성 육군 교도소도 잔디가 푸른 체육구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바뀐 상황에서 증오를 갖는 것은 증오의 대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봤습니다. 역사의 격동기에는 일정한 숫자의 사람들이 감옥을 채우는 법이고 나는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고. 우리 사회가 겪어나가야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내가 해당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스스로 내 속의 사회, 시대의 모습을 좀 더 많이, 넓게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개인적인 감정으로 환원해 갖지 않도록 노력하지요" (강의 후 기자가 한 질문 "적의감이 없는 것 같다"라는 질문에 대한 답)
- "최근 세계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국민경제가 성급하게 파괴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세계화 논리는 특정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주도하는 패권적 질서와 통하는 것으로, 지금의 상황은 그들의 이해관계가 관철되는 세계질서가 구축되는 중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러니 반대편에 있는 우리로서는 WTO, FTA 등에 대해 비판적이어야 하지 않는가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경제나 구조가 변화하는 데는 외부의 충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필요한 단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나치게 외부의존적인 상황에 처해 있지요. 이런 상황에서 외부의 충격을 일정하게 차단하고 한국경제가 세계경제에 맞물려 있는 상황을 줄이는 것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필요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물론 중상위 그룹에 편입되어 패권적 이해관계에 동참하려는 경영방식에서 본다면 패권적 질서와 일정하게 거리를 두자는 주장에 대해 현실성이 없다며 비판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당장 시속 100km의 속도로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자는 주장을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열차가 어디로 가느냐에 대한 고민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현대 자본주의와 패권질서가 과연 지속가능한가라는 의문에 관심을 가지면서 자립적인 경제구조에 대한 중장기적인 대비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은가 하고 생각해 볼 때입니다" (기자들 질문 "직접적으로 현실적인 사안에 대한 발언이 별나다"라는 질문에 답)
- “제가 오래 격리돼 있었던 탓에 현안을 따라가는 데는 아직 늦어요. 그러나 근본에 충실했던 경험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쉽게 놓치는 가치들에 주목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대 한 가운데 서는 체질이 아니므로 조용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다만 강단에 있을 때보다 사회에 대한 목소리를 더 많이 낼 것입니다. 이제 가슴에서 발로 내려와야죠.” (앞으로 진로에 대해 묻는 질문에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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