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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 교수 강준만씨의 글은 읽으면, '야 이거 통쾌한데! '라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번 글은 '대한민국사회'에 분석에 머리 끄덕여지는 이야기를 해서 그냥 넘길 수 없다. 여기 올려 혹 누구 들어온다면 함께 읽기'로 하자. 다 읽고 마음 일어나거든 토론을 붙여보라!

‘청와대 끼리끼리 인사 들통나면 밥 먹듯 거짓말’

<조선일보> 10월14일치 사설 제목이다. 증권거래소 상임감사 자리를 놓고 벌어진 ‘외압’ 논란을 다룬 사설이다. ‘밥 먹듯 거짓말’한다는 말은 최악의 모욕적 비난이다. 청와대가 발끈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게다. 문제는 표현상의 차이는 있을망정 이 사안에 대해 거의 모든 언론이 청와대를 비난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탈권위주의’가 업적이 될 수 있나

나는 그동안 기록으로 남겨둘 생각으로 노무현 정권 출범 초부터 인사 문제를 둘러싼 논란을 일일이 챙겨왔는데, 그 양의 방대함에 나 스스로 놀랐다. 더욱 놀라운 건 노 대통령의 초지일관이다.

그의 인사는 집권 기간 내내 이런저런 이유로 매번 언론의 거센 비판 대상이 되었지만, 달라진 건 전혀 없었다. 개혁·진보 언론의 비판마저 완전 무시당했다.

왜 그랬을까? 이 물음에 답하는 게 노 정권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노 정권의 한 가지 유별난 특징은 ‘확고한 신념’과 ‘도덕적 우월감’이다. 밖에서 뭐라고 하건 들은 척도 않는다. 보수파가 비판하면 ‘악의적 때리기’로 일축하고, 개혁·진보파가 비판하면 ‘부화뇌동’이나 ‘기존 주류 엘리트집단 근성’이라는 답이 예비돼 있다.

왜 그럴까? 노 정권 열성 지지자들이 노 정권의 업적으로 꼽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건 바로 “권력을 놓았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과 세트로 따라붙는 게 ‘탈권위주의’다. 이것만으로도 노 정권은 위대하다는 게 열성 지지자들의 한결같은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자면, 인사권은 대통령의 마지막 남은 통치수단이므로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이의 제기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게 된다.

그러나 권력에 시달렸던 한이 아무리 사무쳤다고 해도 그렇지, 그걸 업적으로 보는 것엔 문제가 있다. 그건 마치 시민운동가가 자신의 업적으로 ‘공익적 봉사’를 내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시민운동가 입문의 조건이 어찌 업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라 노 정권이 과연 권력을 놓았으며 탈권위주의를 실천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대통령 비판이 국민오락이 된 게 그걸 잘 말해주는 게 아니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살벌했던 전두환 시절에도 전두환은 늘 ‘돌’로 상징되는 오락적 소재였다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차이가 있다면 공개적으로 오락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일 텐데, 지난 20년간의 민주화 덕분에 누리게 된 자유가 어찌해서 노 정권의 업적이란 말인가? 그게 업적이라면 그건 이미 대선 때 유권자들의 선택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보는 게 옳다. 대통령 비판이 국민오락이 되었다면 대통령이 도대체 뭘 잘못하고 있는가 하고 성찰을 하는 게 옳지 그걸 업적으로 둔갑시키는 건 곤란하다.

우리가 의외로 ‘권력’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걸 말하려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권력을 1·2·3차원으로 나누어 다루고 있지만, 지금 우리는 현실정치와 관련해선 권력의 물리적 행사라고 하는 1차원적 개념에만 머무르고 있다. 바로 여기에 노 정권의 비극이 있다. 어떤 사안에 대해 권력의 물리적 행사를 하지 않았으니 우리는 깨끗하다거나 떳떳하다는 식의 자기 기만을 범하고 있다. 알고서 그런다면 차라리 다행이겠지만,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 더욱 걱정이다.

정권 아래 알아서 기는 사람들

권력은 상대편의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속된 말로 ‘알아서 긴다’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노 정권 들어 일어난 대통령 친인척·청와대 사칭 범죄 사건 건수가 이전 정권들과 다를 바 없거나 오히려 더 심하다는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특히 공직자나 기업인들에겐 코드 중심의 인사에 집착하는 노 정권이 이전의 독재정권 못지않게 무서운 정권일 수 있다. 자신들이 수구 기득권 세력에게 포위돼 있다고 믿는 피해의식과 더불어 자기들만이 개혁을 대변한다고 믿는 우월주의에 중독된 노 정권 주체세력의 보복력은 ‘정의’와 ‘개혁’의 이름으로 행해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역설 같지만, 노 정권은 오히려 권력의 무서움을 더 각인시킨 정권으로 기록될 수도 있다. 노 정권이 개혁을 ‘목표’ 중심적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정’을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목표’에 종속시켰다. 노 정권은 항변할 것이다. 우리는 인권 탄압을 저지른 적도 없고 정략적 목적으로 정보기관·국세청을 동원한 적도 없는데, 어찌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맞다. 억울하게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권력’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은 2006년이다. 사람들은 2000년대 기준으로 생각하지 70년대나 80년대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문화관광부 차관의 거취와 관련해 ‘배를 째네 어쩌네’ 하는 말이 나왔다는 논란이 중요한 건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이 청와대 쪽에서 나왔을 거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반 서민들이 포장마차 술집에서 자유롭게 대통령과 정권을 씹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해서 탈권위주의 정권이 완성되는 게 아니다. 민주화라는 건 보통 사람들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일 뿐이고, 공직자와 기업인들에겐 정권이 누군가의 배를 쨀 수 있는 힘을 여전히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정권은 독재정권·민주정권을 막론하고 두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또한 정권이 출세를 바라는 사람들에겐 위대한 존재라는 건 예전 그대로인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 강화됐다. 코드 기준의 파격적 인사 덕분이다. 이게 바로 노 정권 지지자들을 감격하게 만든 동력이었지만, 권력에 대한 인식이라고 하는 점에선 ‘진보’보다는 ‘후퇴’에 가까운 결과를 초래했다.

늘 민주파만 집권한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보수파가 집권할 경우 그들이 ‘코드 인사’에만 집착한다면 노 정권 사람들은 뭐라고 말할 텐가? 집권 당시 ‘코드 인사’를 옹호했듯이, 그들의 ‘코드 인사’를 옹호해야 하지 않겠는가?

연봉 4억원의 자리에서 양극화 해소?

노 정권은 정녕 선의의 ‘코드·낙하산 인사’를 하고자 했던 것인가? 그렇게 보기도 어렵다. 정권을 사유화·이권화했다는 혐의를 제기할 수 있다. 물론 그 책임을 노 정권에만 묻긴 어렵다. 권력의 사유화·이권화는 한국적 풍토이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서강대 사학과 임상우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

“지식인의 일차적 자격 조건은 비판이기 때문에 지식계에서 비판의 제기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한국의 지식계에서는 그 비판의 수위마저 조절되고 있다. 즉 이익 유대 공동체의 안위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이 상한선이다. …이제 이 사회에 책임질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우리’의 이익이 있을 뿐이다. 끼리끼리 뜯어먹자판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물론 나 역시 그런 ‘끼리끼리 뜯어먹자판’의 공범임을 인정하면서 말이다. 지식계가 그럴진대, 정·관·재계는 두말할 것도 없다. 그동안 개혁세력은 자기들의 ‘끼리끼리 뜯어먹자판’에 온갖 화려한 명분을 붙여왔지만, 이제 대중은 그 명분에 침을 뱉고 있다.

노 정권은 핏대 올려가며 양극화 해소를 외치면서도 정부 산하기관장 연봉이 폭등하는 걸 장려하거나 방관했다. 이번에 문제가 된 증권거래소 상임감사 자리만 하더라도 각종 수당을 합치면 연봉이 4억원에 육박한다. 운전기사가 딸린 3천cc급(체어맨) 승용차와 비서, 사무실도 제공된다.

이런 종류의 자리가 수백 개나 된다. 노 정권이 정녕 선의의 코드·낙하산 인사를 하고자 했다면 양극화 해소를 외쳤던 김에 정부 산하기관 임원급의 연봉부터 내리고 각종 호화판 혜택을 대폭 줄였어야 한다. 달리 말해, 낙하산 요원들이 그 자리에 갈까 말까 하고 망설이게끔 만들 정도로 해놓고 나서 그들에게 개혁을 위해 봉사해달라고 했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낙하산 요원이 되려고 할 사람도 많지 않았겠지만, 비판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노 정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놀랄 일은 아니다. 일부 서민은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는데도 대통령 이하 고위 공직자 연봉 인상은 칼같이 챙겼으니 말이다. 이 정권이 개혁 인사라며 중용한 사람들의 재산을 까보면 여기저기 부동산에 수십억대의 재산을 가진 부자들이 왜 그리 많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에게 ‘개혁’은 도덕적 우월감까지 만끽하기 위한 호사품이었나 보다.

한나라당은 노 정권의 낙하산 인사를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본질은 외면한다. 낙하산 요원들이 누리는 억대 연봉과 그 밖의 호사 자체를 문제 삼진 않는다. 왜? 나중에 집권하면 그 자리들이 자기들의 ‘끼리끼리 뜯어먹자판’을 위한 전리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정치는 ‘하이에나 산업’, 한국은 ‘하이에나 공화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포 상업주의, 그 감탄할 만한 솜씨

지금 한국 사회의 최대 갈등은 이념 갈등도 아니고 정책 갈등도 아니다. ‘끼리끼리 뜯어먹자판’을 위한 갈등이다. 여야 양쪽은 정권이라는 전리품을 획득하기 위해 ‘공포 상업주의’를 구사하고 있다. 여당은 ‘수구꼴통’이 지배하는 세상, 야당은 ‘친북좌파’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공포를 부추긴다. 자기들의 밥그릇 공포를 국가적 공포로 몰아가는 그들의 솜씨는 감탄을 자아낸다. 그런 재능이 국익을 위해 발휘된다면 한국은 진작에 선진국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거대담론을 사랑하는 지식인들은 중요한 건 ‘정책’이라고 외치지만, 신뢰가 죽은 다음에 무슨 정책이 가능할 것인가? 무슨 조사만 했다 하면 이른바 사회 지도층에 대한 신뢰도는 10%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사회 지도층이란 ‘살벌한 생존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을 의미할 뿐이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이게 바뀌지 않고선 이념·정책 갈등은 무의미하다. 사회 지도층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이념·정책을 팔아 출세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하면 ‘도덕주의’라고 비아냥댈 정도로, 한국의 입신양명·출세 문화는 지독한 면이 있다.

노 대통령이 2004년 5월 연세대 특강에서 “저는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한 대통령이 아니라도 만족합니다. 제 성공의 비결은 인생을 걸고 확실하게 전부를 투자하라는 겁니다”라고 말한 것도 바로 그런 풍토의 소산이었을 게다. 자신이 성공하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또는 ‘책임 윤리’가 노무현에게 없었다는 것, 이게 바로 노무현을 넘어선 우리 모두의 비극이다.

노 정권의 비극은 ‘무능’보다는 ‘탐욕’에 있다. 대통령부터 전투적으로 옹호한 그 수많은 낙하산 요원들 가운데 개혁은 둘째치고 이렇다 할 미담 한 건이라도 만들어낸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스스로 점검해보기 바란다. 양극화 해소를 외치는 참여정부 산하기관장 연봉이 억대라는 건 너무 많다며 그걸 문제 삼은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는가?

‘탐욕’은 다수 인간의 본능일 것이기에 노 정권 사람들만 탓하는 건 불공정할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피해의식 또는 증오심과 결합했다는 데 있다. 노 정권은 국민을 상대로 정치를 해온 게 아니다. 자신들이 증오하는 세력을 상대로 정치를 해왔다.

이런 시각은 부당한가?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항의는 하지 마시라. 노 정권 집권기간 내내 서민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는 명백한 사실에 대해 죄책감을 갖는 게 도리다. 노무현에게 건 기대는 어차피 ‘경제’는 아니었다고? 자기 배 부르다고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 어느 한쪽이 뜯어먹는 걸 독식할 때 뜯어먹기의 양극화 해소를 외치는 건 개혁일 수 있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다. ‘개혁’을 출세와 ‘코리안드림’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것도 정도 문제다.

신뢰 없이 개혁, 위기 극복은 없다

우리 모두의 눈물이 필요한 시대다. 지금 노 정권에겐 반대편에 대한 분노만 있을 뿐 낮은 곳에 대한 눈물이 없다. 고위공직이 봉사와 헌신이 아닌 출세와 군림의 무대가 되어버렸고,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쓰레기통에 처박힌 게 비극의 본질이다. 북한 핵실험 사태가 터지고 보니 ‘신뢰’의 중요성이 새삼 뼈저리게 느껴진다. 신뢰 없인 개혁은 물론 위기 극복도 어렵다. 신뢰를 비이념적 개념이라고 내치지 말자. 노 정권이 그동안 신뢰를 확보하기는커녕 사실상 신뢰를 깨기 위해 애써온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게다. 이제라도 제발 그러지 말자. 신뢰 없인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적어도 공직자들이 하이에나는 아니라는 수준의 신뢰는 갖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 수준의 신뢰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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