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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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칼럼] 서울의 택시운전사 허세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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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1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막바지 협상이 벌어지던 때 택시 운전기사 허세욱씨가 분신했다. 우리 사회의 반응은 대체로 냉소적인 듯하다. 영리하고 영악한 경제동물의 사회답다고 말하려니 동시대인의 한 사람으로 참담하다.

손학규씨의 한나라당 탈당을 두고 “보따리장사” 운운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무의식 안에 보따리장사에 대한 경멸의식이 자리잡고 있듯이, ‘막장’ 운운한 사람의 무의식에도 택시운전사에 대한 그 나름의 평가가 자리잡고 있다. 입만 열면 서민 대중을 위한다고 말하는 위정자들의 속내가 이러하지만, 서민 대중의 대부분은 이런 위정자들에게 거리낌 없이 표를 준다. 서민 대중의 이런 자기배반이 20 대 80의 사회라고 아우성이면서도, 또 민주정치를 누구도 부정하지 않고 누린다고 믿으면서도, ‘80’에 드는 서민 대중이 자신의 생존권을 개선하도록 하는 정치적 힘을 얻지 못하는 이유다. 사회 구성원들이 의식을 형성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교육과정과 대중매체를 지배세력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체제의 충실한 마름이 되어 안온한 삶을 추구하는 기능적 지식인들이 동원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요컨대 ‘20’이 부·지위·권력만 장악하고 있는 게 아니다. ‘80’의 의식세계를 점령하는 장치를 온통 거머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허세욱씨는 마침내 알아냈다. 서민대중을 스스로 배반하도록 하는 지배 헤게모니가 어떻게 작동되고 관철되는지를. 결국 깊은 분노와 안타까움이었을 것이다. 조용하고 겸손한 그를 분신으로 몰아간 것은.

허씨의 분신을 대하는 이 사회의 반응은 속물적이기도 하다. “중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사람이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해 무엇을 알고 극단적인 행동을 벌였겠느냐?”고 말한다. 그렇게 묻는 사람은 그 협정 내용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노무현 정부가 제대로 협정 내용을 공개하지도 않은 채 찬성 여론을 강요하는 폭력을 휘두르지만, 사회 구성원은 정보의 주체가 누구인지 묻지 않는 채 그것을 자기 의식세계 안에 집어넣고 그것을 고집한다. 사회 구성원의 의식은 바뀌지 않고 20 대 80의 사회는 견고해진다.

한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을 평가하려면 제대로 알고 평가하는 게 도리다. 서울의 택시운전사 허세욱씨, 봉천6동 철거민, 관악주민연대 회원, 참여연대 회원, 민주노총 한독운수노동조합원, 민주노동당 당원, 120만원도 안 되는 월급에서 각종 회비를 꼬박꼬박 내고 단체 행사에도 열심히 참여한 사람.

나는 택시운전사의 일상이 어떤지 알고 있다. 서울의 택시 노동 조건이 파리보다 훨씬 나쁘다는 점도 알고 있다. 허세욱씨는 그런 일상 속에서 신문과 책에 줄쳐 가며 읽으며 세상을 공부했다. 대학가에서 사회과학 서점이 사라져 가는 현실에 안타까워하며 〈그날이 오면〉 서점에서 20만원어치 상품권을 구입하기도 한 사람. 그는 시대의 배반을 알아냈다. 그를 무시하려는 것은 시대의 배반에 눈감으려는 것이며, 그를 애써 외면하려는 것은 그가 ‘숱한 나’들을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는 민중이 누구인지, 시민사회 운동이 무엇이며 진보가 무엇인지, 그리고 순탄치 않은 삶을 치열하게 살면서 알아내고 실천에 옮긴 우리 시대의 늠름한 민중의 표상이다. 그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 그의 동시대인이라면 잠시라도 ‘힘내세요 허세욱님 카페’(cafe.daum.net/taxidriver53)를 찾는 성의는 갖춰야 하지 않을까.


재갈 물린 문혁의 진실 : 후제의 신작 다큐 ‘나는 비록 죽었지만’ 중국 당국 상영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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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여성은 벌거벗은 채 병원 바닥에 누워있다. 피가 엉긴 머리와 사후경직의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은 그가 이미 숨졌음을 말해준다.

중 국 독립영화제작자 후제(胡杰, 1958~)의 다큐멘터리 ≪나는 비록 죽었지만≫(我雖死去)은 충격적인 사진 한 장의 공개로부터 시작한다. 이 사진 속 주검의 주인공은 1966년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 완장을 찬 학생들에게 살해당한 첫 교사인 볜중윈(卞仲耘)이다.

그 의 주검을 포함해 가능한 모든 자료들을 사진으로 찍고, 아내가 남긴 모든 걸 40여 년 동안 보관해온 사람은 그의 남편 왕징야오(王晶堯, 85)다. 왕은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은퇴한 역사학자다. 이 작품은 왕이 역사학자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수 있다.

후 제가 왕징야오를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의 들머리에서 후제는 “아내의 주검을 사진으로 찍으며 당신은 커다란 정신적 외상을 입었을 걸로 보입니다”라고 묻는다. “당연하지. 목적은 분명했어. 역사에 정확한, 진실한 기록을 남기겠다는 것.” 그러나 중국인들이 ‘10년 대동란(十年浩却)’이라 부르는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1966~1976)이 끝난 지 30돌을 넘긴 오늘날,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에 관해 진실한 기록을 남기는 일은 여전히 버겁다.

당 시 중국에서 고위 당·정간부의 자제들이 다니던 ‘황가 학교’로 유명한 베이징사범대학 부속중학의 교감이던 볜중윈은 1940년대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뒤 타이항산 지역의 항일 전투에도 참가한 ‘혁명전사’다. 그의 남편은 1940년대의 ‘급진적 민주화 운동가’였으며 ‘직업적 혁명가’가 되는 게 꿈이던 역사학도였다.

1966 년 문화대혁명이 터진 뒤 홍위병이 거리를 휩쓸고 다니면서, 17년 동안 충실한 공산당원이던 볜중윈은 ‘대지주 계급의 딸’이라는 이유로 ‘자본주의로 달려가는 반동분자(走资派黑帮)’로 몰려 ‘비판투쟁(비투)’의 대상이 됐다. 다큐멘터리는 문화대혁명 당시의 이른바 ‘비판투쟁’이나 ‘대자보’라는 게 얼마나 유치하고 난폭하며 역겨운 것이었는지를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홍위병들은 볜중윈의 집까지 점거한 뒤 “집에서라고 자유롭게 행동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추악한 볜 암퇘지!” 따위의 욕설로 가득 채운 이른바 ‘대자보’로 거실과 서재와 방 곳곳을 도배했다. 왕과 볜 부부가 소중하게 간직해온 손때가 묻은 장서들은 거칠게 마당에 내동댕이쳐진 뒤 불꽃 속에서 재로 변했다. 여기서 홍위병이란 그가 재직하던 학교의 열 몇 살짜리 여중생들이었다.

남 편 왕징야오는 홍위병들이 온 집안에 써 붙였던 ‘비투’ 대자보들, 볜을 돼지로 그린 치졸한 포스터들 따위를 모두 사진으로 기록해두었다. 볜의 죽음은 한 사람의 희생이었지만, 다큐멘터리는 문화대혁명 10년이 어떤 참혹과 고통의 아수라장이었는지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게끔 해준다. 베이징 제6중학의 홍위병들이 홍위병 감옥의 벽에 사람의 피로 썼다는 “붉은 테러 만세!(红色恐怖万岁)”란 구호는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인간에 대한 모독의 극치를 목도하는 고통을 관객들에게 안겨준다.

볜은 마오쩌둥이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대자보를 발표한 1966년 8월5일, 홍위병들에게 맞아 죽었다. 못을 박은 각목에 머리와 어깨 등을 맞아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게 사인이었다.

남편은 볜이 죽던 날, 그의 가방에 차곡차곡 들어 있던, 류샤오치(劉少奇)의 ≪공산당원의 수양에 관하여≫(论共产党员的修养) 따위의 작은 책자들을 꺼내 보여준다. 혁명이 어떻게 혁명가를 배신했는지 말해주는 장면이다.

작 품의 마지막에 왕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어간 아내의 마지막 충격이 얼어붙은 어떤 ‘물건’을 40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한다. 혹시 이 작품을 보게 될 분들을 위해 여기에는 적지 않겠다. 왕은 이 모든 것을 언젠가는 세워질 ‘문화대혁명 박물관’에 진열하기 위해 간직해왔다.

얼 마 전 작고한 중국의 양심 바진(巴金, 1904~2005)은 1986년 6월 문혁박물관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몽매한 역사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전시하고 모아두고 기록에 남기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동료가 내게 물었다.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은 다 지나간 일 아닌가. 그런데 그 다큐멘터리를 왜 금지하는가.”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의 역사는 지나갔다. 그러나 그에 관한 진실은 거의 밝혀지지 않았다. 문혁의 적나라한 진실이 공개될 경우 중국공산당의 도덕성이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문혁의 진실이 모두 공개된다면 천안문 정면의 마오쩌둥 사진은 자리보전이 힘들지도 모른다.

중 국공산당은 소련공산당이 과거 스탈린 시절의 공포정치를 너무 적나라하게 파헤쳐, 결국 인민의 공산당에 대한 혐오를 부추겼다고 평가한다. 이 때문에 중국공산당은 비록 문혁을 ‘역사적 오류’라고 평가하고는 있지만, 그 때 저질러졌던 ‘잔혹사’를 그대로 공개하는 데 대해서는 반대한다. 그래서 중국 대륙의 인터넷에서는 문혁 때 ‘비판투쟁’ 따위의 잔혹한 장면을 담은 사진은 찾아볼 수 없다. 검열 당국이 철저하게 삭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편 왕징야오의 ‘기록’에 대한 헌정이기도 한 이 작품은 오는 2007년 6월12일 중국 윈난성 쿤밍에서 열릴 예정이던 ‘윈즈난(雲之南) 다큐멘터리 영화제’ 경쟁 부문에 올랐다. ‘구름의 남쪽(雲之南)’이란 서정적인 이름을 가진 이 영화제는 네덜란드 둔(DOEN)기금, 얀 프레이만(Jan Vrijman)기금 등의 도움으로 해를 건너 열려왔으며, 올해로 세 번째를 맞는다. 그러나 후제의 이 다큐멘터리는 물론, 영화제까지 봉쇄당할 처지에 놓였다. 중국 당국이 후제의 작품을 상영 금지하면서 영화제까지 막았기 때문이다. 40여년 동안 고통스러운 진실을 간직해온 왕징야오의 기록은 아직도 고통의 긴 터널을 다 지나오지 못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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