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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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중국 땅 여순(뤼순)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지 꼭 98년 되는 날이다.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4분 교수형이 집행되고 10시15분 감옥의는 그의 죽음을 확인한다. 1879년생이니 그의 나이 31살이었다. 모친 조마리아는 안 의사에게 사람을 죽였으니 당당히 죽음을 맞이하라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항소를 포기한 그는 형 집행의 날로 3월25일을 원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날이다.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조국의 독립에 대한 염원, 가족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며 종교적 구원의 과정으로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안 의사는 25일 동생들과의 마지막 면회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한번은 반드시 죽는 것이므로 죽음을 일부러 두려워할 것은 아니다. 인생은 꿈과 같고 죽음은 영원한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

안중근 연구의 권위자인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의 자료는 2월14일 사형선고에서 죽음을 맞는 3월26일까지 안 의사의 마지막 행적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동안 안 의사의 최후의 순간, 홍석구 신부의 안 의사 고해성사, 동생들의 면회 등이 소개된 적은 있다. 그러나 이번 자료는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고 있고 일부 잘못 알려준 내용도 바로잡아 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마침 25일부터 여순감옥 뒷산에서는 안 의사 유해 발굴 작업이 시작됐다. 뒤늦게나마 국권이 회복되는 날 유해를 반장해 달라는 그의 유지가 실현되기를 기대해 본다.


사형 선고받다

1910년 2월14일 오전 10시30분 여순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불과 일주일 동안 불과 여섯번의 공판 끝에 안 의사에게는 사형이, 공범인 우덕순 징역3년, 조동하·채동순은 각각 1년 3개월의 형이 내려졌다. 안 의사는 사형이 선고된 뒤 일본 당국의 특별 허가를 얻어 프랑스인 서울주교 구스타프 뮤텔에게 보낸 전보에서 신부를 보내달라는 부탁을 했다.


사형집행일로 3월25일 희망

2월17일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을 면회해 사형선고 판결 등 재판과정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 한 행동을 살인범으로 몰아 심리한 데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안 의사는 “이또 히로부미가 살아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해할 뿐이다. 동양의 한 사람인 내가 이런 나쁜 자를 제거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세례를 준 홍석구(프랑스 이름 조셉 빌렘) 신부가 곧 이곳에 오는데 천주교 신도로서 기념스러운 3월 25일(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날) 처형해주길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3년 만의 만남

3 월7일 여러곡절 끝에 홍 신부가 도착했다. 그는 재판부가 안 의사의 고해성사를 허락한 데 대해 사의를 표명했다. 그는 그러나 고해성사가 신부와 신자 사이에만 이뤄지는 비밀행사이며 이 때문에 모든 일이 당국의 입회 아래 이뤄져야 한다는 형무소법과 충돌하는 문제를 상의했다. (최서면 국제연구원 원장은 입회는 하돼 멀리서 고해성사는 듣지 않는 것으로 절충했다고 설명했다). 8일 오후 2시 홍 신부는 두 동생과 함께 법원 당국의 양해 하에 오후 형무소를 찾아 3년만에 안 의사를 다시 만났다. 홍 신부는 죽음을 앞둔 신자로서 해야 할 바를 알려주고 다음날 고해성사를 하기로 하고 돌아갔다. 홍 신부는 위로의 인사를 하고 서서히 자기가 온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내가 이 만주 여순에 오기까지는 많은 비판과 장애가 많았다. 네가 아는 대로 너와 나는 사제관계에 있어서, 또 이번 거사는 내가 시킨 것처럼 어떤 신문에 와전됐기 때문에 적지 않은 의심을 받아 이번에 오는 것도 어떤 정치적 의미가 있는 것처럼 일반에게 전달되어 비상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홍 신부는 이어 “몇번이고 여기 오는 것을 주저했으나 너와 두 동생의 간절한 부탁으로 나는 여순 법원의 특별 면회허가가 났다는 전보를 받고 여러차례 반복해 고려한 끝에 원래 선교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천명을 받들 나는 국가나 정치에는 전혀 관계가 없고 공명정대한 것만을 생각하여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걸 느끼고 만난을 제치고 여기 오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 면회의 목적은 세가지가 있는데 나는 내 아들인 신앙의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목숨을 잃을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다. 둘째 나는 이번 너의 거행이 살인이라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 셋째 너의 고국의 동포와 교우들은 너의 이 큰 죄로 도저히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어느나라 국법에도 반드시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하며 네가 깨끗히 죽음에 임하는 것이 그 죄를 씻는다는 걸 원하고 있기 때문에 너의 모친과 교우의 위촉을 받아 네가 죽기 전에 일순간이라도 좋은 교우로서 죽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홍 신부는 “3년전 일시 흥분에 쏠려 국가를 위해서 한다고 싸워야 한다고 하고 블라디보스톡에 가려고 할 적에 너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오늘이 올 것을 알고서 가지 말 것을 타일렀다”고 말했다. 또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중략) 감옥장의 후의에 의하여 신부에게 차와 담배를 제공하고 안중근에게도 담배를 주니 홍신부가 대죄인한테 이런 대우를 한다고 고맙다고 하니 형무소 온 이래 법원과 감옥소의 취급은 매우 관대하여 파격적인 걸 미처 생각지도 못한바 특별한 급여를 하고 매일 두번 흡연실에서 차 과자 담배를 제공받았다고 하니, 홍 신부는 새삼스럽게 놀라며 평소 일본의 문명이 들은바 이렇구나 하고 감사의 뜻을 표했다. 교우들도 이 관대함에 눈물을 흘릴 것이라고 하였다”고 돼 있다. 홍신부는 “당국의 허가를 얻었으니 고행성사를 올려 하루속히 죄의 사함을 청하면 하느님은 반드시 네 큰 죄를 용서할 것”이라고 말하고 4시20분 안 의사에게 기도를 하고 떠났다. 면회 중 홍 신부는 마치 어머니가 아들을 껴안는 것 같은 태도로 안을 대하고 안 의사는 어디까지나 경모하는 기분으로 시종일관 말을 들었다고 보고서는 적고 있다.

고해성사와 미사

3월9일 오후 2시 안 의사는 홍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했다. 고해성사는 백지 20장에 걸쳐서 적은 내용을 읽어가며 20분간 진행됐다. 홍 신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같았고, 안 의사도 신부의 귀에 입을 대고 고해성사를 했다. 너무 목소리가 작아 신부 외에는 누구도 들을 수 없었다. 홍 신부는 그렇게 진지하고 생생하게 말하는 것은 참으로 안 의사의 신앙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고 밝혔다. 일본관리들이 고해성사의 내용이 무엇이었는가라고 물었으나 홍 신부는 일체의 내용을 밝히길 거부했다.

홍 신부는 “안 의사의 사형집행이 25일이라고 하는데 혹은 27일 이라는 설도 있어 분명치 않으나 25일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날이므로 만일 그날 저녁 6시에 형이 집행된다면, 천주교 신자가 죽는 데 있어서 이처럼 좋은 날은 없겠지만 27일은 예수가 부활한 날이어서 모든 신자들이 가장 중요한 날로 부활절에 사형당하는 일은 없으므로 만일 27일 사형이 집행된다면 고의로 나쁜 날을 택한 것이 되어 세계여론을 두려워 하여 이날을 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3월 10일 형무소 교회당에서 홍 신부에 의한 미사집전이 있었다. 미사에 참여한 신자는 안 의사 뿐이었다. 그러나 당시 신문들은 교회당 안에는 지켜보는 사람들로 가득찼으며, 천주교 신자가 아닌 참가자들도 미사집행의 엄숙함에 감동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생들의 뜻밖의 면회

3 월 25일로 예정됐던 사형집행일은 순종의 생신인 건원절이었다. 국제적으로 크리스마스와 정월 초하루 국왕탄신일에 사형집행하는 일이 없고 한국에선 의병투쟁이 심하게 전개되고 있어 통감부는 대한황제의 생일에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국제 국내적으로 곤란한 일이 야기되므로 피해달라고 건의했다. 이에 따라 사형집행은 25일에서 26일로 연기된다. 이를 모른 안중근은 25일 간수가 문을 여니 사형집행인줄 알고 나왔는데 뜻밖에도 동생 둘이 면회를 와 있었다. 25일 오후 12시 40분 감옥에서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 나카무라 간수장 소노키 스에키 통역 입회아래 미즈노, 가마타 두 변호사와 안중근의 두동생 정근 공근의 마지막 면회였다. 소노키 통역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일본외무성과 통감부에 보냈다.

안중근은 우선 정근 공근 두동생에 대해서 고향에서 오는 부탁한 한복이 왔느냐고 묻자 두 동생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고 만일 때를 맞추지 못하면 이곳에서 양복을 조달해 드릴테니 걱정마시라고 하였다. 근데 안중근은 미즈노 변호사가 있는 것에 놀라고 어찌된 일이냐고 했더니 미즈노 변호사가 홍 신부가 지난번 여순에 왔을때 병이 나서 오려던 것이 못왔기 때문에 오늘 두동생이 최후에 면회를 한다는 걸 알고 변호사였던 인연으로 만사를 제쳐놓고 위문차 왔다고 하자 안중근은 그렇게도 나에게 동정을 베풀어주니 감사하다고 말하고 두 동생에게는 오늘이 최후의 면회라고 하니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으므로 그런 생각에서 말을 할테니 빠짐 없이 잘 들어달라고 하였다. 그는 우선 노모의 안부에 대하여 두 동생에게 부탁하며 평소에 아들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효도를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이번 사건으로 매우 심려를 끼친 불효의 죄를 용서해주도록 말씀 여쭈어 달라고 부탁하고, 또 다시 이미 애기한 한대로 장남 분도를 장래에 신부로 되도록 길러달라고 하였다. 실은 차남이 중병이 걸렸을 적에 뜻밖에도 하느님의 가호로 회생한 것을 생각하여 차남을 신부로 되게 하려고 생각했었으나 몸이 약해 이에 감당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어 장남을 신부로 만들어달라고 하였다.

또한 정근에겐 너는 장래 공업에 종사하라 한국은 공업이 아직 발달되지 않았으므로 이를 발전시켜야 한다. 지금 돈 밖에 모르는 세상이 되었지만, 실업을 이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말은 꼭 공업에만 종사하라는 것이 아니고 (나무 심는) 식림 같은 일은 한국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일이므로 혹은 식림에 종사하여도 좋다. 결론적으로 국익을 증진시키라는 이야기다. 그것이 곧 우리 집안의 도움이 되는 것이다. 공근에게는 학문에 종사하여 노모와 노모가 살아계시는 고향에서 잘 모시기 바란다. 두 동생은 땅이 넓으니 불편하면 다른 곳으로 이사하여 살테니 어머님은 별로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하더라.

안중근은 두 동생에 대해서 먼저 말한대로 하얼빈에서 찍은 사진을 찾아 왔느냐 물으니 두 동생은 아직 받지 못했지만 귀국하면 시베리아로 이주할 작정이므로 그때 이것을 찾겠다고 대답하였다. 안중근은 두 동생에게 만일 시베리아로 가면 먼저 말한 대로 장봉금으로부터 5천원을 받을 것이 있는데 그 돈은 동의해의 돈이므로 갚으라고 당부하고 다음은 이치권의 아직 갚지 못한 숙박료가 있다고 하고 그 집에 내 가방과 의류와 기타 단지동맹때 자른 손가락을 돌려받아라, 또 두 동생에 대하여 금번 의거에 대하여 각국 신문지상의 논평이 어떻냐고 물으니 두 동생은 한국에서는 의거를 게재하는 일이 용서되지 않고 있으며 일반 국민들은 좋다고도 하고 나쁘다고도 하여 할 수 없다고 했다.

안중근은 “실로 불가사의 한 일이 있다. 내가 연초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을 때 미국의 신문지상에 풍자화가 실려 있었는데 내가 의거하려는 것과 일치되는 것이 있어서 당시 감동받은 바가 있다. 한 한국 미인이 서 있는 옆에 일본 사관이 많이 줄 서 있었는데 미인의 소지품을 약탈하려고 하는 한 일본 사관이 사법권과 외교권이라는 물품을 가져가자 그 뒤에 많은 조선인이 총을 들고 그 사관을 쏘려고 하는 걸 그린 것이다. 이것을 보고 나는 무엇인가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느끼고 크게 웃었다”고 말했다.

입회한 감옥장(전옥)이 면회시간에 제한이 있으니 유언할 게 있으면 그걸 먼저 말하고 여담을 말하라고 당부했으나 귀관들은 목숨이 길고 나는 목숨이 단석에 이르니 이 면회를 좀더 연장해주길 바란다고 하고 두 동생에게 다시 “나는 내 의무를 다하였다. 미리 각오하고 한 일이므로 내가 죽은 뒤의 일에 관해서는 하등 남길 말이 없다. 단 이때까지의 면회에서 이미 말한대로 더 말할 것은 없다”고 말했다. 노모에 대해서는 “자기에 대신해서 효도를 다해줄것을 당부한다. 집안이 화평하게 지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숙부 홍신부 민 주교 안명근, 형수에게는 편지를 써놨으니 이것을 전달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동시에 동생들은 할말이 없냐고 물으니 “아무 것도 드릴 말씀이 없고 형이 분부하신 사회 일에 관해서는 동생들이 서로 협력하여 잘 되도록 노력할 것이니 걱정말고 형의 길을 따르시길 바라며 천당에 오르시도록 희망한다”고 하였다. 안중근은 ”사람은 한번은 반드시 죽는 것이므로 죽음을 일부러 두려워할 것은 아니다. 인생은 꿈과 같고 죽음은 영원한 것이다라고 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다.

미즈노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동정(이해)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을 일으킨 당신의 뜻이 길이 세상에 전해지길 바라며 나도 될 수 있는대로 그 뜻을 전하려고 노력하겠다. 그러니 깨끗히 형에 따르고 빨리 천국에 가시기를 바란다. 천국에서는 언어에 지장이 없을테니 나도 뒤에 천국에 가면 당신과 손을 잡고 정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더니 안중근은 “귀하의 동정과 이해에 매우 감사할 따름이다. 귀하가 이처럼 동정하고 이해해 주시니 감사하다. 그러나 천국에 가는 것은 외국에 가는 것과 같아서 일정한 법이 있다. 모름지기 천주교 교도가 되어 천국에 가도록 하는 것이 어떠냐. 그렇다면 천국에서 같이 손을 잡고 서로 정을 나눌 수 있다”고 기독교 신앙을 권유했다. 가마다 변호사도 “나도 귀하에 대한 동정과 이해는 미즈노 변호사와 같으니 이번 사건과 같은 일이 다시 없도록 노력할 것이니 이해해달라”고 말하였다. 이에 안중근은 나도 “당신에게 감사하는 것은 미즈노 변호사에 대해 한 것과 같다”고 말했다. 세상사로 얘기가 옮겨지자 안중근은 내가 언제까지 끝없이 얘기할 것이 아니니 두 동생보고 돌아가라고 했다.

그리고 간수에 대하여 이제 더 할말이 없다고 하니, 감옥장은 마지막 악수와 기도를 허락한다고 하여 안중근과 두 동생은 기뻐하여 손을 잡고 악수한 뒤 무릅꿇고 기도하고 돌아갔다. 오후 3시 30분의 일이다. 이날 안중근의 태도는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으나 역시 마지막 면회는 서로의 작별의 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형장의 마지막 순간

소노키 세이키 통역은 안중근의 사형집행을 다음과 기록하고 외무성과 통감부에 보고하였다.


살인 피고인 안중근에 대한 사형은 3월26일 오전 10시 감옥소 안의 사형장에서 집행되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오전 10시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과 소관 등이 사형장 검시실에 앉고 안중근을 불러들여 사형집행의 뜻을 전하고 유언의 유무를 물은 데 대해 안중근은 별로 유언할 것이 없으나 자기의 이번 행동은 오직 동양의 평화와 평화를 도모하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므로 바라건데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일본 관헌 각의도 나의 뜻을 이해하고 피차의 구별 없이 합심하여 동양의 평화를 기할 것을 기원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에 동양평화의 삼창을 하도록 허가해줄 것을 제의했는데 전옥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뜻을 설명하고 간수로 하여금 명령하여 백지와 흰 천으로 눈을 가리고 특별히 기도를 드릴 것을 허가하니 안중근은 2분여 묵도를 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간수가 데리고 계단으로 교수대에 올라 태연하게 형의 집행을 받았다. 때는 10시를 조금 넘은 4분이며 15분에 이르러 감옥의가 시체를 검사하고 절명하였다는 보고를 하기에 이르러 이에 집행을 끝내고 일동 퇴장하였다.

10시20분 안의 시체는 특별히 감옥에서 새로 만든 침관에 담아 흰 천을 덮고 교회당으로 옮긴 뒤 공범자인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의 세 명을 끌어내 특별히 예배를 하게끔 하였다. 오후 1시 감옥의 장지에 이것을 매장하였다. 이날 안중근의 복장은 어제밤 늦게 고향에서 온 명주로, 한복 저고리는 흰색 바지는 흑색을 입고 가슴에 십자가를 달았다. 그 태도는 매우 침착하고 안색 언어에 이르기까지 평상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종용 자약 떳떳하게 그 죽음에 이르렀다. 또한 형무소에 쓴 유고 전기는 완전히 끝냈으나 동양평화론은 총론과 각론의 일부에 끝나고 전부의 탈고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이렇게 보고 합니다.



강태호 남북관계전문기자 원문


2008년 봄부터 겨울까지 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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