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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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예가 김형규(41)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백자를 닮았습니다. 그는 백자의 담백함과 소박함, 그리고 그 안에 깃든 따스함이 마음에 든다고 합니다. 백자를 좋아해서 그런지 김씨는 흰색과 인연이 많습니다. 지금 그의 가마터가 있는 곳은 전남 장성군 삼계면 백산 마을. 흰 산이라는 뜻이지요. 친구들은 백산이라는 지명을 따 그에게 희뫼라는 아호를 지어줬습니다. 희뫼요는 그렇게 탄생됐습니다. 지금 사는 장성군 북일면 운암리 산소골도 흰색과 관련이 있습니다. “묘터였으면 묏골이라고 했겠지요. 산소는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곳에 붙이던 이름으로 소는 희다는 뜻이랍디다.”  

  김씨는 제대로 된 백자를 만들려면 만드는 이의 삶이 백자를 닮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백자처럼 단순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단순한 삶은 청빈하고 검소한 삶을 뜻합니다. 김씨는 또 백자에서 풍겨나오는 따스함처럼 자신도 만나는 이들에게 그런 따뜻한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김씨의 삶은 청빈 그 자체입니다. 지난해 10월 그가 몸소 지은 집은 “가로 열여덟 뼘 세로 열두 뼘”의 아주 작은 집입니다. 자재는 집터 주변의 흙과 띠, 그리고 수몰예정지에 버려진 나무를 모아 썼습니다. 벽과 방바닥에 바른 벽지는 주변 농민들로부터 얻은 사료 포대입니다. 집 짓는 데 든 돈은 못값 2만8천원이 전부라고 합니다. 부엌이 딸렸지만 그의 집은 백자의 소박함을 넘어섭니다. 샘터가 세면장이고, 초막처럼 지은 좁디좁은 공간이 화장실입니다. 전기는 들어오지 않고 휴대폰도 ‘터지지’ 않습니다. 김씨는 집처럼 밥상도 소박합니다. 점심은 감자를 삶아 먹고, 저녁은 밥 위에 집 주변에서 뜯어온 나물 몇 가지를 얹어 된장에 비벼 먹습니다. 누룽지가 다음날 아침이지요.

김씨는 산소골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백자를 만들려고 합니다. “전기가 없으니 발로 물레를 차야 한다”면서도 표정은 밝습니다.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질 백자에 대한 기대감 때문입니다. 산소골에 옛날 집터는 있지만 지금은 자신이 유일한 주민이라는 점도 마음에 든다고 합니다.

백산의 가마터에서는 금줄을 쳐놓고 작업을 했지만 이따금씩 사람들의 방해를 받았습니다. “백산에는 멋들어진 정자가 있어요. 그래서인지 거기서는 이상하게 멋을 부리고 싶고 놀고 싶었어요.”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은 눌러도 가끔씩 솟아나고 자기를 만들 때 정성은 늘 조금씩 모자랐습니다. 그가 가족들과 떨어져 산소골로 옮겨온 이유입니다. 가마터를 잡기 위해 1년 가까이 날씨와 바람과 물을 관찰하던 그는 최근 폐가마터를 발견했습니다. 그 자리에 향을 피우고 삼배를 올렸습니다. 너무 좋아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이곳에서 도자기를 굽다 돌아가신 조상님들이 심심하셨을 텐데 막둥이가 와서 도자를 굽는다니 얼마나 좋아하시겠어요. 이제 가마터를 어떻게 앉힐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어요. 그분들이 제게 가마를 물려주신 거나 진배없죠.”


  김씨에겐 이처럼 우연 같은 일이 자주 생깁니다. 그가 도예가가 된 것도 그렇습니다. 김씨는 도예가가 되기 전 스님이었습니다. 출가 이유도 특이합니다. 장성군이 고향인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교과서에 나오는 바다가 어떤 모습인지 보고 싶어 하루 동안 가출해 영광군에 다녀왔습니다. “부모님에게 혼이 났지만 그 하루 동안 제 생각이 훌쩍 자랐어요. 그때부터 함께 놀던 벗들이 어린아이처럼 느껴지더군요.” 그처럼 김씨는 어릴 때부터 궁금하거나 배우고 싶은 게 있으면 참지 않았습니다. 출가한 이유도 스님들의 삶과 생각이 궁금해서였습니다. 스물 네 살 때 머리를 깎았습니다.

절에서는 또 다른 인연이 그를 기다렸습니다. 절에서 운영하는 가마터에 갔다가 나무를 때는 모습을 보고 “태양에서 한 점을 떼내 가져온 듯한 빛”에 반해 도자기 만드는 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출가자로 4년쯤 지내자 ‘절집’에 대한 궁금증은 풀렸습니다. 반면 도자기 만드는 일에 대한 열망은 커져갔습니다. 세상으로 돌아오기로 했습니다. “환속해서 도자기를 만들며 수행하겠다”는 그에게 도반들은 차라리 목을 매라며 만류했다고 합니다.

그는 환속할 때의 다짐대로 수행하듯이 도자기를 만들었습니다. 도자기가 전시된 곳과 가마터를 다니는 일이 그에게는 만행이었습니다. 도자기를 구경하기 위해 박물관을 집 드나들 듯 다녔습니다. 학계에 보고된 전국 24곳의 가마터도 샅샅이 훑었습니다. 그가 발견한 가마터만 7개나 된다고 합니다.

또 대학을 나온 ‘주류’ 도예가들의 무시에도 분심을 가지지 않도록 마음을 닦았습니다. 화가 날 때도 있었지만 그는 낮아지고 또 낮아지려고 노력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들 또한 큰 가르침을 준 고마운 분들”이었습니다. 한때 우리나라 최고의 도자기를 만들겠다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실력이 쌓이자 다른 도예가를 무시하는 마음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 또한 버렸습니다. 돌아보니 모든 도예가들이 한 모둠 안에 있는, 모두들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훌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니 도자기를 만드는 자세도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황금비례율, 발색 등 자신이 정한 틀에 따라 도자기를 만들었지만 지금은 그 틀조차 버렸습니다.  

  “다기를 빚고, 가마에 불을 넣으며 상상을 합니다. 노 선승이 핏줄이 드러난 야윈 손으로 오래된 마루에 탁 내려놓을 때 둔탁하지만 경쾌한 소리를 내는 다기, 호박단추가 달린 마고자를 입은 촌로가 어디가 예쁜지는 모르지만 왠지 마음에 들어 호두를 만지듯 만지작거리는 다기, 고운 자태의 참한 여인이 차를 낼 때 들고 있는 다기 말입니다.”


그런 마음을 담아서인지 김씨의 다기 희뫼요는 차를 좋아하는 이들 사이에는 꽤 이름이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무에게나 다기를 팔지 않습니다. 사고 싶은 사람이 찾아오면 먼저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눕니다. “딸 아이를 시집 보낼 때처럼” 자신의 다기를 귀하게 여기고 아껴줄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면 다기를 건넵니다. 그런 마음은 있지만 돈이 없어 머뭇거리는 사람을 보면 다기를 싸놓았다 다음번에 만날 때 거저 주기도 합니다. 그의 다기에 대해 전매권을 달라는 사람이 있었고, 서울이나 대도시에 희뫼요 전시장과 판매점을 내겠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돈을 벌거나 상을 받으러 도자기를 빚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마음공부 하듯이 한 것이지요.”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 감사할 일밖에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때의 가출, 출가, 도자기 가마와의 만남 등. 특히 97년 장애인자활기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다 만나 결혼한 아내는 남들이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에도 구김살 없이 두 아이를 키우며 늘 그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는 “큰 스승이자 부처님”이었습니다. 그런 감사한 마음은 그가 만든 자기 그 가운데도 찻잔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가 만든 찻잔은 한 손으로 잡으면 어딘가 어색합니다. 두 손으로 잡으면 편안합니다.

“제가 만든 다기로 차를 마시는 분이 그 순간만이라도 다기, 차, 물, 앞에 앉은 사람을 포함해 차 한 잔을 자신 앞에 가져온 삼라만상에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장성/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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