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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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하늘이 준 소명이라는 게 있나 봅니다. 윤영주(46)씨를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윤씨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국가 자격증이 두 개나 됩니다. 윤씨는 의사와 한의사 면허를 함께 갖고 있습니다. 그는 의과대학에 먼저 들어갔지만 의료인으로서는 한의사 자격을 먼저 땄습니다. 어떤 자격을 먼저 땄는지 순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의 얘기를 듣는 사람이 보이는 반응은 비슷합니다. "와 잘 살겠네."


하지만 윤씨의 삶은 일반인의 '기대'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의 생활은 소박하기 짝이 없습니다. 옥수동의 단독주택에서 전세를 사는 그는 자동차도 없이 늘 대중교통을 이용합니다. 그는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지난 4월에는 부원장으로 일하던 한의원마저 그만두고 지금은 백수입니다.


"잠원동 집의 전세금을 빼 강북으로 이사하니 돈이 남아 당분간은 여유 있게 지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과 논문을 쓸 시간도 필요했구요. 주위에서는 저보고 철이 없다고 해요. 하지만 빚을 내서 사는 것도 아니고 필요한 만큼은 벌어요. 제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가 하고 싶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윤씨가 하고 싶은 일은 '동서의학의 소통과 협력'입니다. 그는 이를 자신의 소명으로 여깁니다.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한 뒤 예전에 다니던 서울대 의대에 재입학해 의사가 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의학과 한의학을 함께 배우면서 그는 두 의학의 장단점을 알게 됐습니다. 서양의학은 응급 상황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서양의학의 도움으로 살아난 사람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또 서양의학은 여러 가지 검사를 통해 정확한 진단과 예후 판단이 가능했습니다. 수술 기술은 경이롭기까지 했구요. 또 서양의학은 질병과 치료를 양적으로 측정해 눈으로 확인하게 해줍니다. 하지만 만성질환의 치료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윤씨는 한의대에 다니면서 고혈압이나 당뇨 같은 만성병이나 루푸스, 시신경변성, 재생불량성 빈혈 등 서양의학에서 난치병으로 여기는 질병이 호전되는 것을 보며 한의학이 지닌 장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의학은 서양의학이 중요하게 여기는 근거중심의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비과학적으로 보일 경우가 많았습니다.


동서양의 의학을 함께 배우면서 윤씨는 우리나라에서 동서양 의학이 담을 높이 쌓고 경쟁을 벌이는 현상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서양의학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한의학도 중의학이나 일본의학과 달리 변질되지 않고 의술의 고갱이를 잘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두 의학이 협력하면 환자 치료는 물론 의술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동서양 의학은 동서양의 물리적 거리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의사와 한의사는 서로 불신하고 비판하며 미워했습니다.


"지금도 어떤 의사 선배는 저를 사이비 종교에 빠진 불쌍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후배들도 그래요. 저는 좋아하고 믿는데 한의사들은 못 믿겠다고 합니다." 한의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들이 인체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바탕에 둔 치료라고 믿는 동양 의술을 '쇠꼬챙이로 찌르고 불로 지지는' 야만적인 행위로 인식하는 서양의사들을 무시했지요.


"제 경력이 두 의학 사이에 가교를 놓는 데 조금 유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서울대 의대를 나온 사람이 한의학에 대해 말하면 의사들이 조금은 더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겠어요?"


윤씨는 의사에게 한의학의 장점을 한의사에게 서양의학을 장점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기회는 쉽게 찾아왔습니다. 2006년 서울대에서 보완대체의학 강좌를 개설했습니다. 서울대를 시작으로 경북대, 경희대, 단국대, 동국대, 아주대 등 여러 대학의 의과대학에서 의대생을 대상으로 한의학을 강의했습니다. 최근에는 의사들과 함께 한의학 공부모임도 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학에서 강의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학점 때문에 수업을 듣긴 하지만 한의학에 호의적인 학생들은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줄어들고 있긴 하지만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한의학을 아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수업 시간이나 인터넷 게시판에는 비판적인 질문이 줄을 이었습니다. 음양오행 이론은 과학이 아니라 철학이 아닌가? 한방치료는 너무 두루뭉술하다, 같은 질병에 대해서도 한의사마다 처방이 다르다 등. 익명의 설문조사에 쓰인 글은 '이런 강의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나 '금쪽같은 시간을 이런 데 허비하고 싶지 않다'처럼 더욱 격했습니다.


윤씨는 한의학에 대한 이런 오해가 이해와 소통의 부족 탓이라고 여깁니다. 그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지켜본 의과대 선후배 동료들의 믿음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그들이 한의학을 알게 되면 지금처럼 무조건 배척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윤씨는 80년대를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예과 시절 서울 봉천동의 달동네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하던 그는 의사의 길에 회의가 들었습니다. 그가 만난 사람들은 '사회경제적인 이유'로 질병을 얻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밥 잘 챙겨 먹고 과로하지 말라는 처방을 따를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좀 더 평등한 사회가 되면 그들의 병도 사라질 것이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환자를 고치는 일도 중요하지만 사회를 고치는 일이 더 근본적인 처방으로 보였습니다.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이어 노동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과정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그가 다시 의료인의 길에 들어선 것은 가정 문제 등 개인적인 어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불교와 동양철학을 공부하다 한의학을 만나게 됐습니다. "의술이 아니라 삶의 방식, 세상을 사고하는 방식"으로서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의학은 질병 치료에도 많은 가능성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를 의과대 선후배 동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서울대 의대에 복학한 이유입니다.


"저처럼 한의사와 의사 면허를 함께 가진 사람을 박쥐처럼 여기는 분들도 있어요. 하지만 환자들은 스스로 서양의학과 한의학을 통합해 치료를 받고 있어요. 양한방 협진 병원이 늘고 서로에 관심을 갖는 의료인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머지않아 두 의학이 벽을 허물고 협력하는 시대가 오리라 믿습니다."


권복기 기자


◈‘의사를 위한 한의학’ 책 펴내

윤씨가 펴낸 <한의학 탐사여행>(유(u)-북 펴냄)은 '의사를 위한 한의학' 책입니다. 책에는 2006년과 2007년 서울대 의대에서 이뤄진 한의학 강의와 그때 나온 질의응답이 담겨 있습니다.


책의 앞 부분 '한의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는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차이점, 한의학의 기본체계와 핵심 개념, 진료의 실제 등 한의학 전반에 대한 내용을 서양의학과 비교하면서 요약해 실었습니다.


책 내용의 대부분은 강의실과 온라인 게시판에서 이뤄진 뜨거운 논쟁을 옮겨놓은 것들입니다. "뜨겁고 긴장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는 윤씨의 말처럼 참의사의 길을 걷겠다는 사명과 서양의학에 대한 자부심이 투철한, 졸업을 앞둔 의대 본과 4학년 예비 의사들의 질문은 날카롭기 그지없고 어떤 질문은 메스처럼 날이 서 있습니다.


'양의학에서는 표준화가 중요한 개념인데 침구술에 표준화가 가능한가' '한의학은 진실성을 검증하기 힘든 동양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의학 개념에서 발전되기 힘든 게 아닌가' '한의학은 지동설이 입증된 시대에 천동설을 주장하는 게 아닌가' 등등.


한의사로 강단에 섰지만 서울대 의대 선배이기도 한 윤씨의 답변은 진지하고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자구 하나에도 신경을 썼다"는 말처럼 오해나 불필요한 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의사와 한의사 독자의 생각과 입장을 섬세하게 배려한 흔적이 글 곳곳에 묻어납니다. 추천사를 쓴 서울대 의대 지제근 명예교수는 질의응답을 "이 책의 진수"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한의학 탐사여행>은 의료인이나 의료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물론 교양으로서 서양의학과 한의학을 비교하며 함께 공부하고 싶은 일반인들에게도 크게 도움이 되는 책입니다. 장상론, 망문문절, 팔강변증 등 한의학의 원리를 간단하지만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책에는 윤씨가 학창시절 캠퍼스에서 참의사이자 세상을 고치는 의사의 길을 놓고 치열하게 토론하고 고민하고 부대꼈던 의과대 선후배 동료들, 지금도 형제처럼 가까운 그들이 한의학과 소통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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