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h CEO 17

DoMath
  • 공리와 모델 : 모델에 대한 상상 농담 , 모델의 참-거짓과 유용성 ,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 관계
  • 모든 일은 때가 있다. 동어반복 아닌가? 모든 일이 그렇게 되었을 때를 '때'라고 한다면 모든 일이 그렇게 되었을 때가 되어야 일을 이룰 수 있다가 되고, 이것은 trivial tautology다.
  • 다 덜어내고, 골격만 남긴 다음 선입견 완전히 빠진 골격 강조. 거기가 상상력의 진지. 아지트, 교두보, 뼈.

초고

점은 거시기고 직선은 머시기다


창조의 원천은 상상력에 있다. 21세기를 지식의 시대로 부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창의성과 상상력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사회적으로 상상력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인 것이다. 그렇다고 상상력이 일시적 유행이라고 할 수는 없다. 누구가에겐가는 생존이 걸린 문제일 수도 있다. 영화 ‘잠수종과 나비’에서는 살아있음이란 상상하기가 아닌가 묻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왼쪽 눈 하나만 빼고는 식물인간인 ‘쟝’은 상상속에서 나비처럼 세계 어디든 가고 무엇이든 만들어낸다. 그는 짧은 세월이었지만 살아있음을 만끽한다.

상상력이 경쟁의 무기로 필요하든 본질적으로 인간의 조건이든 창조성과 상상력은 우리 시대의 코드인 것은 분명하다. 상상력과 창조성의 탄생과 작동 원리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어디에선가는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정열을 쏟아 붓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매우 창조적이었던 사람들에 대한 사례들을 모아 그들의 공통된 성질을 뽑아 해법을 찾는다. 예를들어 하워드 가드너는 ‘열정과 기질’에서 프로이트, 아인쉬타인, 피카소, 간디를 포함해 창조적 기질이 매우 강했던 일곱 명의 사람들을 분석한다. 또 로버트 루트번쉬타인의 최근의 저서 ‘생각의 탄생’ 도 마찬가지다. 그는 관찰(observing)부터 통합(synthesizing)에 이르기까지 상상력을 학습하는 13가지 생각도구를 지침으로 제안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상상하는 동안 몸은 화학반응을 할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에 기초해서 어떤 이들은 사람의 뇌나 몸에 돋보기를 댄다. 이런 연구가 꽃을 피워 마침내 사막에 샘이 솟구치듯 상상력에 발동을 걸고 필요한 시간만큼 이어갈 수 있는 안전한 약을 만들어 싼 값에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불행히도 그런 시대 전에 태어났다. 특효약 개발은 요원해 보이는데 당장 상상력이 간절하게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나에게 맞는 방책을 마련해야 할텐데 어떻게 가능할까? 나는 수학적 사고가 매우 효과적인 방도를 제시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상상력을 해명할 방도가 어디에 어떻게 있다는 수학 공식은 없다. 특효약을 개발하려면 수학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할 것 같긴 하다. 수학이 확장되는 속도를 보면 머지않아 그런 수학이 탄생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알기로는 아직 ‘상상력 발동 공식’ 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해도 수학은 상상력을 발동하는 방책을 준다. 수학적 사고 과정 자체가 곧 자유로운 상상과 창조의 과정이다. 동의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1 + 1 = 2 이기만 하다고 가르치고 정해진 답이 있는 문제만 풀어대는 꽉막힌 수학 공부로 어떻게 상상력을 자극하여 아름다운 창조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수학은 매우 엄해서 꽉막힌 것처럼 보인다. 수학이 아름답고 자유롭다고 제아무리 꾸며봐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소한 것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는다. 작은 오류도 서릿발 같은 엄중함으로 다스린다. 평생 공을 들여 성과를 냈다고 해도 이치가 들어맞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같다. 오류가 없다 해도 아름답지 않으면 곧 소용이 없어진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치열한 냉정함이 창조적 공간을 확보해준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상상하겠다고 무턱대고 끙끙거리고 앉아 있어봤자 상상이 시작할 수는 없다. 어딘가 발을 대고 있어야 하고 무엇인가 손에 들고 있어야 한다. 창조와 상상을 위해서는 적당한 도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상상력이 의미있는 창조로 이어지느냐는 그 도구를 부리는 숙련도에 있다. 현대 수학은 블랙홀처럼 그 도구들을 흡수해가고 있어서 수학의 도구가 무엇인지 손꼽아보라고 하면 답하기 쉽지 않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엔 도무지 수같지 않은 수들이 수의 세계에 들어왔고, 주가 변동 곡선, 나무가지나 달팽이 모양, 해안선, 움직이는 선들처럼 지독하게 복잡한 모양까지 도형의 세계에서 다룰 수 있을 만큼 인류는 수학을 발전 시켜 왔다. 어떤 수학자는 동물의 발동작을 연구하고 있고, 어떤 수학자는 더 좋은 요트를 개발하는데 참여하고 있고, 현대 언어학의 선구자인 촘스키는 수학적 방법으로 언어를 해부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수학의 효용성은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어간다. 그러다보니 산업시대의 화석 연료를 대신할 지식 시대의 핵심 연료로 수학이라는 에너지를 꼽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수학의 전통적인 도구는 역시 기본적인 수와 도형이다. 수와 도형은 원래 양과 공간에 관련한 현실적인 문제를 풀기 위해 등장했다. 양을 몰고 집을 나갈 때 몇마리고 돌아올 때 모두 무사히 돌아왔는지 세어보는 일부터, 땅의 넓이를 재면서 단순화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나중에는 수와 도형이 사람과 땅과 하늘의 일까지 해명해주는 이치가 담겨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점점 발달해간다. 수의 시작은 ‘하나’ 와 ‘0 ‘이고 도형의 시작은 점, 직선, 원이었다. 그것들은 태초의 원재료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더 이상 단순하게 말하기 어려울 만큼 단순한 그것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공기처럼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보면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수에 둘러 싸여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아침마다 몇동 몇호의 집을 나서서 몇번의 번호가 적힌 차를 타고 몇번 주파수의 라디오를 들으며 몇시 몇분까지 일하러 나간다. 컴퓨터 화면을 켜도 신문을 펼쳐도 수들은 숨을 쉬고 있다. ‘나’라는 존재도 수로 지정된다. 전 세계 사람 하나에 수 하나씩만 대응시킨 여권 번호는 외국으로 갈 때 ‘나’를 보증해준다. 숫자로 되어 있어서 눈치채기 힘들지만 나의 개인정보가 상당히 노출시키는 주민등록번호도 있다. 손에는 나만의 번호가 있는 전화가 들려 있으며 누굴 만날 때는 이름과 함께 그 번호가 찍힌 명함을 주고 받는다. 물건을 사고 숫자들이 적힌 카드로 결재를 하고 정해진 번호의 예금 계좌에서 정해진 시점에 정해진 만큼 빠진다. 의식하지 않은 사이 우리는 쉴 새 없이 수를 본다.

볼 수 있는게 이 정도이지, 안보이는 것까지 하면 수란 그야말로 우리 생활에서 공기처럼 되어버렸다. 컴퓨터에 이 글을 쓰고 동안 나는 손가락으로 글씨를 때려 넣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0과 1로 된 수들의 조합을 나열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이 활자들을 수들로 정의된 네트워인 인터넷을 통해 이메일로 날려 보낼 것이고, 다른 조합으로 편집될 것이다. 글자로 환생하여 지금 독자 앞에 드러나있을 터이지만, 이 글자들이 여기까지 오는 과정 내내 수들의 조합으로 살았던 것이다. SF 영화 ‘매트릭스’ 의 오프닝 장면처럼 지금도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수들이 녹색비처럼 쏟아지고 있다. 이들은 너무나 복잡해서 만약 우리가 이 모든 수들을 볼 수 있다면 미치지 않고는 베겨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몇 십년 년 전만하더라도 상상도 못할 일이다. 이렇듯 수만 떠도는 게 아니다. 도형들도 마찬가지다. 점, 직선, 원과 같은 기본 도형들도 항상 우리와 함께 있다. 너무 익숙해서 못볼 뿐이다. 화이트(white)가 부른 ‘네모의 꿈’ 이라는 노래를 들어보면 세상은 온통 네모, 조금 정확히 말하면 직사각형에 둘러싸여 사는 것만 같다.

네모난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떠보면
네모난 창문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
네모난 문을 열고 네모난 테이블에 앉아

로 시작해서 신문, 책상, 건물, 지폐, 컴퓨터, TV 를 거쳐 네모난 사진, 네모난 편지에 이르더니, 추억마저 네모같은 것이 되어버려서, 마침내,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 뿐

이라고 한숨을 내쉰다. 노래에 담긴 메시지에서 한발 물러나 수학적 안테나를 켜보면 노랫말은 사실 억지일 뿐이다. 고개를 들어 천천히 둘러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는 ‘네모의 꿈’ 대신 ‘동그라미의 꿈’ 이라는 노래를 그리 어렵지 않게 지어낼 수 있다.

동그란 해가 뜨면 동그란 눈을 떠
동그란 컵에 물을 마시고
동그란 바퀴를 굴려 동그란 터널을 지나

로 시작해서 동그란 동전, 동그란 탁자, 동그란 접시, 동그란 술잔에 빠진 동그란 달, 동그란 공, 동그란 우산을 두루 거쳐, 조금만 더 애써보면, 동그란 그리움까지도 다다를 수 있다.

네모난 추억이라는 말을 떠올린 상상력에 박수를 보내지만, 듣는 이들까지 그 상상의 결과에 고착되면 우울해져 곤란하다. 사실 네모는 매우 단순한 도형이기 때문에 굳이 우울해할 것 없다. 게다가 네모로 된 것들은 그 모양일 때 가장 좋았기 때문에 네모인 것이고, 동그란 것은 원의 모양일 때 가장 좋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크다. 표면적이 정해졌을 때 부피를 가장 크게 하는 게 공모양이라는 수학적 법칙을 선택해서 물방울이 자신의 모양을 정했을지 모른다. 카드나 명함은 수학적 황금 비율로 만들어져서 보고 만지기에 썩 괜찮다. A0 전지에서 A4 로 줄여올 때 가로와 세로가 1:의 비례인 네모 모양이어야 버리는 종이가 가장 적고 그래야 지구도 더 오래 푸르를 수 있다. 너무 쉽게 결론을 내리면 안되겠지만, 드러난 모양들은 나름대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우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상상력을 일으키기 위해서 가장 먼저 나도 모르게 고착된 이미지, 선입견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선입견을 버린다는 건 단순한 것이 갖는 중립성을 받아들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네모와 원은 좀 나은 편이다. 점과 직선처럼 단순한 도형까지 생각하면 너무 많아 쓰기가 겁날 정도다. 점은 국제 항공 노선도에는 주요 공항으로 드러난다. 비행 구간은 점과 점을 선으로 잇는 것으로 표시된다. 수억 인구가 쓰는 전화기들은 점과 직선으로 표현된다. 단순한 도형으로 바꿔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수식으로 바뀌고 그 덕분에 항공로 체계를 효율적으로 하고 통화 대기 시간을 최소로 하는 방안을 고안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읽어내는 건 억지로 갖다 붙인게 아니다. 눈에 드러난 복잡미묘함 너머에 놀라우리만큼 단순한 무엇인가가 실재로 버티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들 너머를 보려고 애쓰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것들은 너무 익숙해지고 만다. 익숙한 것은 편안하지만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변화의 기회를 빼앗기도 한다. 고흐나 겸재 정선의 풍경화에 감동해서 그림을 구해 벽에 걸어두었다고 해도 가끔은 마음먹고 낯설게 다가가지 않으면 그것은 벽과 다름이 없어지고 만다. 익숙함에 절어있으면 일상이라는 베일에 숨은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의 동맥경화를 유발하기도 한다. 누군가 나를 깨우쳐주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주위의 익숙한 것들을 그리고 마침내 나 자신을 함부로 할 위험이 없지 않다..

캔버스에 53.5 제곱 센티미터의 검은사각형 하나만 있을 뿐인 말레비치의 그림 Black Square 은 너무 비싸서 경매가 성사되지 못했다. 존 케이지는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닫는 “4분 33초’라는 음악(?)과 라디오 소리들 몇개의 조합으로 세상을 경악시켰다. 현대 예술의 중요한 특징이 바로 ‘단순성’의 발견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예술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을 판단하는 사고 과정에서도 ‘뽑아내기’ - 추상화(abstracting)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복잡한 것에서 단순한 것을 뽑아 그것들끼리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보는 자. 가끔은 단순한 것으로 환원해보라. 때로는 그것 자체가 거대한 창조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복잡함에서 감각 너머의 단순함으로 가는 고속도로처럼 미끈하고 쭉 뻗어 있을까? 그렇지 않다. 반대다. 단순한 것이라고 해서 쉽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복잡함에서 단순한 것을 포착해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끈기와 훈련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는 복잡한 것들은 능숙하게 자기를 위장하고 있거나 사람들이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것을 완강하게 붙잡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답으로 충분할까? 그 정도로는 아주 중요한 것이 빠져 있노라고 수학은 에둘러 말해주고 있다.

그 전에 먼저 고백할 게 있다. 어디에나 가장 단순한 수학적 도형들이 있는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수와 점과 직선 어느 것도 당신에게 보여줄 수 없다, 절대로. 내가 당신에게 보여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구에게 그것을 보여줄 수 없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수가 아니다.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하필 지금 유행하는 기호-숫자일 뿐이다. 그리고 점, 직선, 원은 모두 본래의 그것과 닮았을 뿐 그것이 아니다. 점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도 그릴 수도 없다. 마릴린 먼로나 스칼렛 요한슨의 얼굴의 매력점은 점이 아니다. 그림밖으로 용이 날아가도록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찍었을 때 찍은 것도 점이 아니다. 수평선의 고른 선은 직선이 아니다. 아무리 정확한 자로 미끈한 표면에 레이저로 반듯하게 선을 그어도 직선이 아니다. 비슷하지만 모두 가짜다. 수학의 나라에서는 그렇다. 무슨 말일까?

일상에서는 점이다 싶으면 두리뭉실하게 그냥 점이라고 하면 그만이지만, 수학의 세계는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두리뭉실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분명하게 정하지 않고 두리뭉실하게 두었다가 수백년이 지나 골치아픈 문제가 되거나 믿고 있던 생각을 뿌리째 바꿔야 하는 수학적 사태가 몇 번 발생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단순해보이는 점과 직선은 이런 사태의 최전방에서 활동한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사태가 진정되어 매듭지어 질 때 즈음 새롭게 해석된 점과 직선에 대한 이해에 기초해서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원리가 나온다. 이 흥미진진한 사태에 대해서는 따로 보기로 하고 우선 점이나 직선을 결코 볼 수도 만들수도 없다는 문제로 돌아가기로 하자.

영화화된 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는 이에 대해 부분이나마 답을 하고 있다. 80분 만 기억하고 모은 기억은 원점으로 돌아가버리는 장애를 가진 박사는 어느날 저녁, 밥을 먹다 말고 여주인공인 파출부에게 젓가락을 대고 연필로 직선을 긋고는 이런 말을 한다. “자네의 직선은 끝이 있어. 원래 직선의 정의에는 끝이 없지. 그리고 아무리 날카로운 칼로 연필을 꼼꼼하게 갈아도 연필심에는 굵기가 있어. 따라서 여기 있는 직선에 너비가 있는거지. 즉 넓이가 생긴거야.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실제 종이에는 진정한 의미의 직선을 그리기란 불가능하는 얘기야.”

박사가 ‘원래 직선의 정의에는 끝이 없지’ 라고 했지만, 사실 그 ‘원래’ 란 진짜 원래(原來  ; in the beginning , naturally)가 아니다. 어떤 시대, 어떤 사람의 어떤 책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게 옳다. 또 그때만해도 그것은 ‘정의(definition)’가 아니라 ‘공리(axiom)’였다. 그 어떤 시대란 지금부터 2000년에서 2500여년 전 고대 그리스고, 어떤 사람은 유클리드(Euclid) 이며, 어떤 책이란 그의 저서로 알려진 ‘원론’ 이란 제목의 책이다. 이 시기는 ‘배움, 탐구’ 라는 본 뜻의 Mathematics 라는 말이 탄생한 시점이기도 하고 대부분의 수학자들도 이 시기를 수학의 탄생기라는데 고개를 끄덕인다. 그 시기의 핵심 인물 플라톤의 주요 저작들에서 현자들이 모여 수학을 주제로 심심찮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면 보면 당시 지혜를 찾던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수학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 같다.

500여년 전 라파엘이 그린 걸작 벽화 ‘아테네 학당 (The school of Athens)’에는 그 시대의 스타들이 총출동한다. 이 그림의 소실점을 이루는 한 가운데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한가운데서 걸어오고 있다. 라파엘은 그가 영향을 많이 받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닮은 인물로 플라톤을 묘사했다. 그림에서 플라톤은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매력적인 젊은 남성으로 묘사된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고 손가락 모두를 쭉 펴고 땅과 수평이 되게 하고 있다. 두 사람의 손동작은 그들이 들고 있는 책과 인과관계가 있다. 플라톤이 왼손에 든 책은 ‘티마에우스’ 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왼손에 든 책은 ‘윤리학’ 일 것이다. 플라톤이 지혜의 전당으로 세웠다는 아카데미 입구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문을 들어오지 말라(Let no one ignorant of geometry enter)” 고 새겼다고 전한다. 그의 ‘티마에우스’는 우주의 조화와 질서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는 책으로 정다면체, 황금율 같이 수학적으로 중요한 개념들이 등장한다. 거대한 프레스코 벽화인 라파엘의 그림에는 고대 그리스의 현자들이 더러 생각에 잠겨 있고 더러 논쟁 중이며 더러 웅성거리고 있다. 이 그림 오른쪽 아래에는 어떤 인물이 네모판에 컴퍼스로 도형을 그리고 있다.

생김새는 다른 그림과 다르지만 그가 ‘원론(Elements)’의 저자로 통용되는 유클리드일 것이다. 유클리드는 플라톤 아카데미의 사형(師兄) 격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믿기 힘들겠지만 열 세 권으로 된 묶음인 그의 ‘원론’은 기독교의 성경 다음으로 가장 자주 출판되었고 인류 문명에 절대적 영향력을 끼쳤다. 실제로 고대 로마, 아랍, 중국 등 시대와 장소를 옮겨가며 민족은 흥망성쇠를 거듭하였지만, 이 책은 그때마다 다른 언어로 번역되면서 지혜를 찾는 사람들에게 널리 읽혔다.

책의 순서는 질서 정연하다. 첫 부분에 가장 기초 개념들에 대해 분명하게 정의한다. 물론 시작은 점과 직선이다.

1.점은 부분을 갖지 않는 것이다.
2.선은 폭이 없는 길이이다.
3.선의 끝은 점들로 되어있다.
4.직선은 그 위에 점들이 고르게 있는 선이다.

제 1권은 이렇게 가장 기초적인 것들에 대한 정의로 시작하여 마침내 23번째 ‘평행선’을 정의하고 마친다.

이어서 방금 정의한 ‘그것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정해주었다. 예를들면, 이런 식이다.

어떤 점에서 다른 점으로 하나의 직선을 그릴 수 있다.
끝이 있는 직선은 끊임없이 이어갈 수 있다.

어떤 것은 공준(Postulate)라 하고 어떤 것은 공리(Axiom) 라고 불러 그 뜻은 당시에는 조금 달랐지만 오늘날은 통합해서 그냥 공리라고 한다. 그리고 공리로부터 매우 조심스럽게 ‘정리(theorem)’라고 부르는 새로운 성질들을 뽑아내고 ‘증명(proof)’이라고 불리는 논증을 덧붙인다. 이런 공리들이 모두 참이라고 받아 들이는 체계를 유클리드 기하학이라고 부른다. 이중 하나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건 다른 기하학이 된다. 자명한 말인 것 같지만, 이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인류는 이천년을 들였다. 책은 어디에도 군더더기 한점 없이 엄격하게 정의 - 공리 - 정리 - 증명으로 도도하게 이어져간다. 이런 구성은 끈기를 갖고 그 책을 탐구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순수 다이아몬드를 보는 듯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앞에서 80분 기억 장애를 가진 박사가 말한 점과 직선의 정의는, 사실, 점의 정의와 직선의 공리를 대신해서 말한 것이다. 아무튼 유클리드의 원론에 나와있는 점이나 직선에 대한 정의나 공리를 보면 자명해서 더는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보일 뿐 따져보면 그렇지 않다. 우리가 제아무리 작은 점을 찍어도 부분이 없게 할 수는 없다. 우리가 까마득하게 작은 점을 찍었다고 해도, 나노로봇에게는 지구보다 거대할 수 있다. 아무리 작은 단위의 로봇을 만들고 그 로봇이 자기보다 억만배 작은 로봇을 만들어 다시 그것의 억만배 작은 공을 가지고 논다고 해도, 그 초소형 공에 붙은 먼지하나도 결코 점이 될 수 없다.

점은 부분을 갖지 않은 것이라고 했는데, 부분을 갖지 않은 것이라니, ‘부분’은 무엇이고, ‘것’은 무엇일까? 선은 폭이 없는 길이라 했는데 폭이 없다는 것은 무엇일까? 직선은 그 선들의 점들이 고르게 있다는데 부분이 없는 점들이 어떻게 선을 이루고 게다가 ‘고르게’ 있다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 유클리드의 원론에서 그런 질문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이천년 동안 기하적 - 공간적 성질들을 탐구하는데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듯 보였다. 모든 것은 너무나 자명했다. 하지만, 19세기에 접어 들어서 이런 믿음이 너무 순진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문제는 세계의 지성들을 떠들썩하게 했고 다른 진영들끼리 몇십년에 걸쳐 치열한 공방이 있었다. 결국 결국 유클리드의 공리들로는 흠이 많아서 다듬고 보태야 할 것들이 있다는 알게 되었고, 또 공리란 항상 참이라고 말하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점과 직선과 같이 지극히 순수하고 단순한 것들은 그것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하더라도 포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단순한 것으로 가려는 우리의 노력이 호락호락 하지 않는 수학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엄밀함과 정확성이 생명인 수학이 아무리 포착하려 해도, 그것들은 항상 미끄러져 빠져나가버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추상화(abstracting)라는 사고 과정을 우리는 원천적으로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이 문제에 새로운 해법을 제시한 저작이 20세기의 목전에 탄생하게 된다. 1899년 현대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하는 힐베르트(D.Hilbert) 는 당시 수학의 중심지였던 독일의 괴팅겐 대학에서 한 강의를 엮고 다듬어 매우 저작을 세상에 내놓았다. 책의 제목은 ‘기하학의 기초(The foundation of geometry)’다. 당시 초판이 출간 될 때도 이미 엄청난 공을 들였을텐데 그로부터 30년 동안 다시 고치고 다듬어서 1930년 7차 개정판이 출판된다. 제목부터 건조하기 짝이 없는 이 책은 서문도 매우 짧고 이어진 본문 제 1장도 거두절미하고 이렇게 시작한다.

어떤 것들에 대한 서로 다른 세 시스템을 생각하기로 하자 : 첫 시스템을 이루는 것들을 점들이라고 부를 것이며, A, B, C, ... 라고 쓸 것이다. 두번째 것들은 직선이라고 부를 것이고 ‘a, b, c , ... ‘라고 쓸 것이며, 세번째 것들은 평면이라고 부르고 α, β, γ ,... 라고 쓸 것이다.

이보다 더 무미건조할 수 있을까. 이런 글쓰기가 사람들이 수학에 진저리 치게 하는 원인이지만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수학적 아름다움은 시적인 단순 명료성과 이치에서 한치도 어긋남이 없어야 하니까. 그런데, 이 정의(?) 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바로 점과 직선이라고 ‘부르기로 한 것’에 대해 아무것도 아직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이후 어디서도 점과 직선이란 ‘원래 무엇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이것들끼리 어떻게 관계맺는지만 말해 줄 뿐이다. 첫째, 둘째, 세째 공리는 이렇게 이어진다.

서로 다른 두 점이 있으면 그 점들을 포함하는 직선이 있다.
서로 다른 어떤 두 점에 대해서 그 점들을 포함하는 직선은 하나를 넘지 않는다.
직선에는 최소한 두 점이 있다. 그리고 하나의 직선에 있지 않은 점이 최소한 셋있다.

이 공리들이 의심할 수 없는 진리인지 아닌지는 아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점, 직선, 평면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바로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는 ‘바로 그렇게’ 있는 것들을 우리는 ‘점’ ,‘직선’, ‘평면’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들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형 존재가 아니다.

‘부분을 갖지 않는 것이 점이다’ , ‘반듯하게 있는 선이 직선이다’ 에서 그냥 쿨하게 ‘이것과 저것은 다른 것들인데 점과 직선으로 부르기로 하자’ 고 하기까지 이 천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점이나 직선이 과연 무엇이냐’ 고 따져들다가 자가당착에 빠져 궁색하게 마침내 회피한 것은 아니다. 포착하기는 점과 직선은 너무나 단순했던 것이다. 수학의 세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도구에 대해서는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 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으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 수 있을까? 다행히 정의가 사라져도 딛고 설 땅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현대 수학은 무엇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방법 대신 무엇은 다른 무엇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다고 밝히고 거기를 딛고 섰다. 작지만 큰 차이다.

사실, 관계로 존재를 아는 방식은 이때가 처음도 아니고 유일하게 현대 수학에서 일어난 현상이 아니다. 신영복은 저서 ‘강의’에서 그런 관점에서 논어, 묵자 같은 동양 고전들에서도 그런 관점으로 다시 읽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고 노장사상이나 불교의 연기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가쉬통 바쉴라르 (Gaston Bachelard)는 ‘부정의 철학 ’에서 서양 철학, 과학, 수학에서 19세기를 기점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이 크게 변했다는 것을 자세히 말하고 있다. 불확정성 원리를 발견하여 양자역학의 발전에 절대적 공헌을 한 하이젠베르크의 말은 그 핵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현대물리학은 주관과 객관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하지 않는다…양쪽의 상호 관계성을 중시하고 있다…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질문방식 속에 나타난 자연이다…자연은 우리와 떨어져서 멀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존재의 드라마이다. 그 속에서 인간은 배우도 되고 관객도 되는 것이다. 자연은 나와 관계할 때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관점의 변화는 이처럼 생활과 동떨어진 듯한 용어인 인간, 자연, 점, 직선에 통하는 말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조직과 사람을 보는 방식에서도 유용하다. 나를 알고 싶으면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서 답을 찾아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점이라 불리는 그’것’은 직선이라 불리는 다른 ‘것’들과의 네트워크적 어울림 안에서 비로소 있게 되었다. 이것이 될 수도 있고 저것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잡한 것에서 단순한 것을 찾아가는 여정은 생각만큼 그리 쉽지 않다. 네모와 동그라미로 단순화 시켜서 보는 시도를 할 수 있지만, 보였던 것들을 다시 보려하면 금새 모호해지고 만다. 복잡한 것에서 단순한 그 무엇(thing)을 찾으려고 해서는 만족할만한 해답이 아닐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단순한 것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일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물론 최소한의 훈련과 끈기를 요구한다. ‘기하학의 기초’를 쓸 때의 힐베르트 만큼은 아니라도 .

‘부분’이나 ‘반듯함’과 같이 꾸미는 말을 떨어내고 점과 직선을 상호 관계 안에서 파악해야 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지만, 힐베르트가 했던 대로 그’것’들을 꼭 ‘ 점과 직선’ 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점과 직선이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이 낫다. 그렇게 이름짓는 순간 우리도 모르게 경험과 관습이 지시하는 바를 따르려는 성향이 생길 수 있고 , 그래서, 우리의 상상력은 선입견으로 차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상상력에게 힘을 실어주려면 점과 직선처럼 단순한 것들에 대해서부터 우리는 중립적이 되어야 한다.

몇 년 전 개봉했던 영화 ‘황산벌’은 역사적 사실을 독특하게 설정해서 인기를 끌었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대사였다. 역사극의 관습적 말투를 사투리로 바꿔치기 한 것이다. 한번만 더 생각해보면 TV 나 영화에서 봐왔던 관습적 말투가 거짓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관습은 우리를 거기에 묶어두려 한다. 말투와 해석에서 먼지털듯 가볍게 관습을 툴툴 털어내는 영화적 상상력 덕분에 시간과 공간 저 너머의 인물들이 살아 우리 곁으로 올 수 있었다. 그 영화로 오래 동안 묻혔던 말도 살아았다. 당나라와 신라의 협공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백제 의자왕은 장군 계백을 불러 눈을 끔벅끔벅 뜨면서 말한다. “ 계백아... 니가 좀 ...거시기 혀야겄다.” 이 말만 놓고 보면 백제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는데도 계백의 눈동자는 불타오른다. 그 ‘거시기’ 가 무엇인지 아무런 단서를 밝히지 않았는데도 통한 것이다. 거시기의 정의와 공리하나도 밝히지 않았다. 그럴 때 그 ‘거시기’ 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었다. 영화의 엉뚱한 설정에 나는 웃어 자빠지면서 순간 계백이 ‘거시기’를 더 엉뚱하게 해석하기를 기대했다. 예를들어 ‘즉각적인 투항’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의자왕과 계백이 통한 것은 수학적으로 보면 놀라운 우연이었을 뿐이다. 어쩌면 ‘거시기’라고 말했을 때, 의자왕은 즉각적인 투항을 뜻했는데 계백이 황산벌에서의 결사 항전을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나오는 ‘거시기’는 말하기 곤란한 대상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강원도나 전라도 사투리에는 그와 유사한 말로 ‘머시기’라는 말도 쓴다. 나의 아버님은 가끔 “ 저, 그 거시기가 말여, 머시기 했다니까.” 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당황해서 어리벙벙할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그 내용이 ‘무엇’이 ‘무엇’을 했다는 것인지 알아서 해석해 왔다. 지금까지 우리 가족이 별 탈없이 사는 건 복권에 당첨되는 것보다 큰 행운이다.

힐베르트가 점을 점이라고 부르기로 한 것은 그가 ‘기하학의 기초’를 세우고자 하는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하학의 기초를 세우지 않아도 되는 우리에게는 마지막 관습마저 버릴 자유가 있다. 마지막으로 떨구어 낼 것은 점이라는 지칭어다. ‘풀’이라고 말하면 풀냄새가 날 수도 있는 법이다. ‘점’ 하면 나도 모르게 떠오를 수 있는 익숙한 선입견을 떨어내기 위해 ‘거시기’라고 불러보기로 하자. 직선 대신 ‘머시기’라고 불러도 아무 상관없다. 둘은 다른 시스템이라고 했으니 같은 이름을 주는 것만 피하면 된다. 이제 거시기와 머시기로 바꾸어서 보면,

서로 다른 두 거시기가 있으면 그것들을 포함하는 머시기가 있다.
서로 다른 어떤 두 거시기에 대해서 그것들을 포함하는 머시기는 하나를 넘지 않는다.
머시기에는 거시기가 최소한 두 개 있다. 그리고 하나의 머시기에 있지 않은 거시기는 최소한 셋 있다.

이렇게 해놓고 보니, ‘있다’ 와 ‘포함하다’와 같은 말도 실은 모호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상상력은 복잡한 것에서 단순한 것을 뽑아내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단순한 것에 옷을 입히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모호함을 상상력으로 채워볼 수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점이 ‘그 무엇(thing)’이라고 하기 보다 ‘어디(position)’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낫지만 공리가 세 개만 제시된 상황에서 우리는 거시기와 머시기와 포함하다라는 여백을 상상으로 채울 자유를 갖고 있다.

연필로 까맣고 동그란 표시를 한 다음 거시기라 하고 자로 반듯하게 그은 표시를 머시기라고 한 다음, 머시기가 거시기를 통과해서 지나면서 그 안에 쏙 들어가 버리는 것을 ‘포함한다’ 또는 ‘거기에 있다’ 라고 받아들여도 된다. 그렇게 상상하고 받아들이면 거시기는 우리의 경험과 관습이 만들어 낸 직관적인 점이 되고, 머시기는 직선이 된다.

거시기를 도시로, 머시기를 도로로, 포함하다를 정차한 다음 지나가다로 상상해도 된다. 앞에 든 공리들을 적용해보자.

두 도시는 오로지 하나의 도로로만 연결되어 있고,
한 도시만을 위한 도로는 없으며
최소한 세 도시가 있는데 도로로 연결되지 않은 채 따로 떨어져 있는 도시도 없는

도시 교통 체계를 상상할 수 있다. 거시기를 열매로, 머시기를 가지로, 포함하다를 매달려 있다로 상상해도 된다. 꽃과 나비여도 되고, 남자와 여자여도 된다.

제시된 공리를 만족하기만 하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어떤 형태이든 창조해도 된다. 도로- 교통 체계일 때 도로의 모양은 구불구불 할 수도 있고, 입체 고가도로일 수도 있다. 도시 대신 사람이어도 되고, 포도 알맹이여도 되고, 구름이어도 된다. 사람과 미움 관계라고 상상해도 된다. 무엇이든 상관없다, 제시된 상상의 조건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대신 상상의 조건은 공리에 제약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가 정한 거시기와 머시기에 대한 세 공리를 받아들일 때, 도시라면 최소한 도시 세 개는 상상해야 하고, 사람이라면 최소한 세 사람을 상상해야 한다. 또한 도로 체계에서 소외된 도시는 없어야 하고 사람과 우정 관계로 상상하려면 왕따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창조해야 한다. 그런가하면 두 사람 사이에 이런 우정과 저런 사랑이 헷갈리는 세상은 그리지 않아야 한다. 상상력이 어디에 디디는지에 따라 서 있는 자세가 결정되기도 하고, 자세에 따라 허리병이 있을 수 있고 없을수도 있다.

이렇듯 지어진 이름에 대한 선입견이나 복잡한 익숙함에서 물러서서 보면 결국 남는 것은 거시기와 머시기의 관계가 이루는 구조가 앙상하게 드러난다. 비로소 우리의 상상력이 딛고 가야할 지점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이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도 사실은 과도하게 절망을 상상하여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주역의 산지박(山地剝) 궤는 더 어려울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인 상황을 뜻한다. 신영복은 ‘강의’에서 이를 다시 해석했다. 역경이 우리에게 선사한 꾸밈을 벗은 상태, 다시 말해 공리만 남은 상태를 직시할 절호의 기회로 보기를 권한다. 그 반대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매우 잘 될 것 같은 상황도 희망을 위한 희망이 꾸밈으로 덕지덕지 붙은 헛것일 수도 있다. 상상력을 발동하기 전에 먼저 상상력이 디딜 그곳을 직시해야 한다. ‘그것’들을 덜어내고 거시기와 머시들의 관계들만 남길 때 비로소 상상력을 펼칠 안전한 아지트가 생긴다. 이제 남은 일은 내가 잘 부릴 수 있는 상상력의 수단으로 자유롭게 상상을 펼치면 된다. 하지만, ‘마음껏’이라고 해도, ‘공리’ 로 남은 이치들 중 어느 하나라도 틀어지면 공리까지 떨구어갔던 여정을 쓸모없게 만들어 버리는 위험한 상상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하자.

‘기하학의 기초’가 공간을 이해하기 위해 인류가 수천년의 공을 들여 이룬 성과라면 나를 위해 ‘내 삶의 기초’ 를 써보기로하자. 내가 맡은 일에 대한 기초, 우리 조직의 기초를, 내가 자주 만나는 사람 관계의 기초를 써볼 수도 있다. 공이 많이 들어가야 하는 방대한 작업 일 수있지만 심심풀이 놀이로 해도 된다. 심심풀이 놀이라고 해서 호락호락하게 그 모습을 드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조심성과 끈기 없으면 얻을 것도 별로 없다.

보충

  • 서문 부분 대폭 수정 / 간결하고 구체적이고 생활/상황 속에서
  • 마지막 부분 보완 : 가볍게 다듬어 매듭 짓기

‘황산벌’에서 '거시기'를 연기한 이문식은 한 인터뷰에서,

아무 생각없이 하면 안되죠. 그것도 노력 많이 해야되요. (...) 죽는 사람은 죽는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죽는 거니까요. 근데 그 역을 맡은 이문식이라는 배우는 뭔가를 해야하는 거잖아요. (...) 여기저기서 비슷한 경험 끌어오고 상상력 동원해서 캐릭터를 만들고 내 연기에 녹이는 거죠.
또 우연인지 모르지만‘머시기’ 역을 한 배우 김광식도 다른 인터뷰에서“배우의 연기력이란 상상력”라 했다. 영화감독이 되어 그들에게 점과 직선의 공리를 주고, 연기를 주문하고 싶다. 어떻게 연기할까?
  • 수도 사물의 모든 속성을 빼내고 오로지 그것의 가장 단순한 것만 뽑아낸 결과다. 양 한마리건, 돌 하나건, 사과 하나건, 부족의 전사건 상관없이 ‘하나’ 로 보아버린 것이다.
  • 점의 '부분'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점을 계속 깍아간다' 는 개념으로 깍고 깍아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라는 투로 말을 하는 것이 낫겠다. 실제로 깍는 것 같은 구체적인 표현법을 찾아야 한다.

보충 가능 자료

  •  : 「I」「명」「1」작고 둥글게 찍은 표.
  • 직선 :꺾이거나 굽은 데가 없는 곧은 선.
  • 평행선  : 「명」 「1」『수1』같은 평면 위에 있는 둘 이상의 평행한 직선. ≒나란히금˙패럴렐〔1〕˙평행 직선. 「2」대립하는 양자의 주장 따위가 서로 합의 없이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여야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린다./노사 양측은 양보 없이 평행선을 긋더니, 결국 타결을 보지 못했다.§
  • 거시기 산악회
  • 윤금초 시조작법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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